‘인간의 조건’, 책 읽기 미션 시시하게 끝내지 않으려면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KBS 2TV <인간의 조건>에서 미션으로 '독서'를 선택하는 걸 보고 내가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저런 프로그램에서 책 읽는 연예인들은 왜 추리소설이나 SF를 안 고르는 거지?'였다.

아니, 사실은 다른 게 먼저였다. '도대체 왜 책 읽는 게 "물 아껴쓰기", "전기 아껴쓰기" 같이 "극복해야 할" 미션인 거야?'가 먼저였다. 그 다음은 '왜 연예인들이 책 읽는 프로그램들은 다 저렇게 재미가 없는 거야?'였다. '왜 추리소설이나 SF를 고르지 않는 거지?'는 3번째였을 것이다.

그래도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추리소설, SF 운운'이 가장 신경 쓰인다. 왜 이들은 이런 책들을 고르지 않는 것일까? 이들이야 말로 '읽는 즐거움'을 위한 책인데.

내가 생각하는 답은 의외로 이런 책들이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그 진입 장벽을 느끼지 못한다. 어렸을 때부터 셜록 홈즈 축약본을 읽으면서 장르 속에 녹아들었으니까. 수많은 독서가들이 독서의 과정 중 셜록 홈즈를 거쳐갔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독서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은 진입장벽을 관통하는 이 통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SF는 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여름 블록버스터 절반이 SF 영화여도 SF 소설은 소수의 취향이다.

그러려니 하자.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고르는 책들에 '즐기기 위해' 읽는 '재미있는' 책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딱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책을 읽으라는 미션에 난감해하고 이 임무를 비교적 수월하게 돌파할 수 있는 '쉬운 책'을 찾는다. 의무감을 느끼는 몇 명은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책'을 선택한다. 어느 쪽이건 별 재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모두들 억지로 읽는 것이니까.

연예인 책 읽기 미션이 늘 시시하게 끝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원래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발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독서야 말로 자발성이 없으면 시시해지는 행동이다. 읽은 사람과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 모두가 재미있으려면 독자가 그 과정을 즐겨야 한다.



연예인들에게 책을 읽히는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이 자명한 사실을 무시한다. 책을 '물 아껴쓰기'와 '전기 아껴쓰기'와 같은 불편하지만 중요한 의무로 생각하는 한 이들은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MBC <무한도전>처럼 영리한 프로그램도 독서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졌다. 하하가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평전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페이지를 끝까지 넘기고 '오펜하이머는 똑똑해서 좋았겠다'를 반복하는 감상문을 읽는 걸 듣는 건 거의 고통스러웠다. 물론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굳이 진지한 감상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핵폭탄과 매카시즘에 대한 진중한 내용의 책을 읽혀놓고 거기에서 어떤 것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그 기획은 실패가 아닐까?

이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은 독서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며 이를 지켜보는 과정을 통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잊는다. 휴대 전화에 들어있는 음악들이 소유주의 개성을 보여주듯, 독서 리스트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준다. 그리고 개성만큼 연예인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던가? 그런데 정작 이런 프로그램에 나와 책을 읽을 때만 되면 이 사람들은 자기를 보여주는 대신 대형서점 베스트셀러나 학교에서 방학 때 나누어주는 필독 리스트에나 오를 책들을 고른다. 그 책들은 다들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대한민국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걱정하고 이를 경고하려는 사람들은 모두 1년에 평균 몇 권을 읽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평균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많이 읽는 것보다는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서의 재미도 모르고 습관도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이 과연 그 '양서'들을 챙겨 읽을까? 저 멀리 있는 '양서'에 대한 의무감만 짊어지고 아무 것도 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습관이, 책에 대한 애정이 중요하다. 정 연예인이 책 읽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국민의 독서 습관을 고취하고 싶다면 '양서'는 잊으라. 그들이 자기에게 맞는 책을 발견하게 돕고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하라. 그리고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해 아무나 붙잡고 신나게 떠들게 하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양서' 따위는 잊으라. 하긴 방송에서 '양서'라고 알려주는 몇 권의 책이 몇천 만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모두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다. 자신에게 좋은 책을 찾는 건 개인적인 탐색이다. 굳이 방송에서 간섭할 필요는 없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K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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