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비티’ 시각적 체험이 살아있는 우주 조난극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그래비티>는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한 조난극이다. 영화는 3D효과가 극대화된 시각적 충격 속에서, 우주공간에 고립된 주인공이 지구로 돌아오기 위해 벌이는 사투를 담는다. 영화는 물리적 재난을 맞은 주인공이 망망한 우주공간 한가운데서 느끼는 극한의 공포를 체험시키며, 이 과정을 통해 지구에서 심리적 재난을 겪은 주인공이 깨닫게 되는 철학적 각성을 전한다. 3D의 진가를 알 수 있는 장엄한 스펙터클에, 간결하지만 긴장미 넘치는 생존의 서사를 지니며, 철학적 은유와 각성이 녹아있다는 점에서 <그래비티>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비견될 만하다. 두 작품 모두 <아바타>를 뛰어넘는 3D걸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 우주공간을 체험시키는 숭고미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물들 덕택에 이제 우주공간은 별로 낯설지 않다. 그러나 최근 논란이 된 한국최초의 우주인 선발과정이나 이소연 씨 강연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우주공간에 발을 디디는 것이 그리 만만치 않다. 우주복과 무중력 상태에 적응하기 위한 수개월간의 훈련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는 아예 우주공간에서는 어떠한 생물도 살수 없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시작 후 20분간의 롱 테이크를 통해 우주공간이 어떤 곳인지 관객들에게 조용히 체험시킨다. 마치 과학관의 체험부스처럼, 영화는 광활한 우주 속에 한 점으로 떠있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느끼게 해준다.

영화는 미래가 아닌 현재에 우주공간에서 일어날만한 재난의 상황을 물리적으로 꼼꼼하게 재현한다. 영화 속 인물이 겪는 무중력 상태에서 느끼는 불안과 고독, 그리고 우주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역설적 의미의 폐소공포는 ‘공상과학’이 아닌 ‘과학적 리얼리티’를 지닌다. (흔히 SF 즉 ‘사이언스 픽션’을 국내에서는 ‘공상과학 소설’로 번역하지만, ‘과학소설’이라 번역하는 것이 옳다. SF는 허무맹랑한 공상을 담는 게 아니라, 과학적 리얼리티와 정합성을 추구하는 장르이다.)



인공위성의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기 위해 6개월간의 훈련 끝에 첫 우주여행에 나선 의공학박사 라이언(산드라 블록)은 임무수행 도중 비상상황을 맞는다. 폭파된 러시아 인공위성에서 날아온 잔해로 인해 라이언은 우주공간으로 떨어져나간다. 곧 베테랑 우주비행사 맷(조지 클루니)이 라이언을 구하러 오지만, 이들이 타고 온 우주왕복선은 파괴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있다. 지구와 교신도 끊기고 산소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우주정거장으로 향하던 두 사람은 또다시 재난을 맞는다. 이제 혼자 남은 라이언은 낯선 우주에서 어떻게 지구로 돌아갈 것인가.

<그래비티>는 지구 위 600 킬로미터 상공에서 벌어지는 우주선의 난파와 조난과정을 보여준다. 몇 번의 위기상황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다음으로 도약하는 라이언의 모험기는 상당한 서스펜스를 지닌다. 또한 라이언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연결을 풀어버리는 맷의 희생은 숭엄한 여운을 남긴다. 죽음을 각오한 추락과 익사 직전의 장면까지, 영화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래비티>는 우주공간이 주는 경이로움과 숭고함으로 가득하며,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모험을 감행하는 극적 긴박감이 살아있다.



◆ 중력이 지닌 중의적 의미

<그래비티>에서 중력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중력은 물리적인 의미에서 영화의 서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라이언이 우주로 간 동기가 되었던 딸의 죽음은 순전히 중력 때문이다. 또한 우주공간은 중력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중력으로 인한 궤도운동과 낙하운동이 상쇄되어 벌어진 무중력의 상태에 라이언이 놓여있는 것이다. 폭파된 인공위성 잔해가 90분마다 들이닥치는 것도 중력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라이언을 공력가열로 태워 죽이거나 익사시킬 위험에 빠뜨리는 것도 중력이다.

즉 <그래비티>에서 중력은 서사의 중심에서 작용한다. ‘그래비티(gravity)’는 중력, 혹은 인력으로 번역된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말이 뜻하듯, 지구 안에서건 밖에서건 중력(인력)의 작용은 피할 수 없으며, 다만 매우 다르게 작용한다. 대기권 안에서는 강하게 존재를 정박시키고, 우주공간에선 존재를 둥둥 떠다니게 한다.

둘째, 영화에서 중력은 심리적인 의미를 지닌다. 중력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인력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력을 뜻하기도 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우주에 오니 뭐가 좋은가” 묻는 맷에게 라이언은 “조용해서”라고 답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사막이 좋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깨끗해서”라고 답한 것과 쌍벽을 이루는 매우 쿨한 답변이다. 영화 초반 맷과 동료가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라이언은 말이 없다. 딸의 죽음이후 그는 말문을 닫은 채 집과 병원만 오가며 살았다. 저녁 8시에 멘트 없는 라디오를 들으며 끝없이 운전만 했다는 그의 상태는 고요한 우주속의 무한한 유영과 다를 바 없다. 그에게 지구는 너무 소란스럽거나 사람들 사이의 인력이 너무 강한 곳이다. 그는 우주공간의 고요함에 묻혀 스스로 고독에 침잠해갔다.



그러나 막상 교신이 끊기고 우주공간에 고립되자, 그는 인간의 말이 못 견디게 그립다. 맷이 주절거리던 농담의 결말이 무엇이냐고 절박하게 묻고, 우연히 교신하게 된 제3세계 지구인과의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를 통해 비상한 용기를 얻는다. 전파를 타고 들려 온 강아지소리와 아기소리는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체념에 빠진 그에게 ‘어머니 지구’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목숨을 건 도약을 감행할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인간세계의 일상을 담은 소음은 이승의 소리로서, 망망한 우주공간 혹은 저승언저리를 떠돌던 라이언의 영혼을 탯줄처럼 잡아끈다.

마침내 그는 말한다. “이제 나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이다. 돌아가서 모험담을 이야기하거나, 10분 내에 타죽거나” 이는 불가해한 인생에서, 언제나 허공에 첫 발을 내딛을 때 필요한 결단의 언사이다. 우주정거장에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던 그는 발사단추를 누르고, 뜨거운 추락을 거쳐 마침내 물속으로 떨어진다. 부유물이 떠 있는 양수 같은 물속에서 우주복을 벗고 나온 그는 최초의 인간처럼 땅을 디딘다. 단단히 나를 정박해주는 중력, 내가 발 딛고 살아야 할 인간세계. 그는 까마득한 고독의 항해에서 돌아와, 엄마의 젖가슴 같은 흙을 움켜쥔다. 이제 다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수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인력이 있다. 그 인력에 건배를!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그래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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