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파이브’를 통해 본 복수극의 정의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20세기 초만 해도 추리소설이라고 하면 퍼즐 미스터리만을 가리켰다. 추리소설을 쓰는 건 게임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었고 수많은 작가와 평론가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들었다. 녹스 주교의 10개 원칙, 반 다인의 20개 원칙들이 그 중 가장 유명하다. 지금은 이들 규칙을 따르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추리소설이 범죄를 다루는 폭넓은 장르로 넘어간지 오래되었고 그들 규칙 중 몇 개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취향을 따르거나 당시의 시대상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무런 정보없이 녹스의 10개 원칙을 읽는 독자들은 왜 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키지 말아야 사는 건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어플레이를 중시하는 추리소설의 성격과 규칙은 중요하다. 아직도 이 규칙을 따르는 수많은 소설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규칙들이 추리소설 장르의 디폴트 값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퍼즐 미스터리에서 벗어난 책을 쓴다고 해도 작가는 자신이 그 중심점에서 얼마나 벗어난 책을 쓰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책의 중심이 사라져버린다.

비슷한 이유로 이야기꾼들을 위한 복수물의 규칙도 필요한 게 아닐까? 물론 복수물은 복수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는 장르는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복수극인 <햄릿>도 복수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그 희곡을 쓰는 동안 자기가 벗어나야 할 복수극의 원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계산에 넣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한 일탈이 가능했던 것이다. 박찬욱의 <올드보이>는 어떻게 봐도 일반적인 복수극의 전형성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건 기본적인 복수극을 기대하는 관객들의 기대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복수극의 디폴트 값을 만들어내는 규칙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꼭 지켜야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벗어난 것이 정상적인 복수극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알아두자. 여기서 정상적인 복수극이란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이나 그 사람의 대리인이 그 일을 저지른 상대에게 잘못에 어울리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여기서 주인공은 정의감에 차 있지만 그의 정의감은 함무라비 법전에 가깝고 대부분의 경우 준법정신이 그렇게 투철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복수극은 우리가 현실세계에서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그려 대리만족을 체험하게 하는 판타지다.



(1) 복수는 하라고 있는 것이다.

추리소설 이야기의 목적이 범인을 잡는 것이라면, 복수 이야기의 목적은 복수를 실행하는 것이다. 물론 세상 일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아서, 복수의 대상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아닌 경우도 있고, 복수자가 오히려 악인인 경우도 있고, 복수자가 중간에 복수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복수담에서 복수는 온전히 달성되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놀랍게도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연속극들은 이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주인공에 대한 박해가 14회까지 이어지다가 15회에 복수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16회에 화해와 용서로 끝나버리는 이야기들이 남발된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이것이 복수극의 디폴트값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끝난다고 화해와 용서만 남을까? 천만에. 시청자들은 14회까지 이어진 학대의 상처와 얼렁뚱땅 용서를 받고 빠져나간 허구의 인물에 대한 해소되지 못한 증오만을 품은 채 무력하게 버려지게 된다. 이게 '성숙한' 결말이라고 착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건 그런 복수극을 디폴트값이라고 우기는 시스템이 얼마나 피학적인 변태인지를 보여줄 뿐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복수극은 복수를 끝까지 밀어붙일 것이고, 거기에서 벗어난 드문 작품들은 시청자들을 고의적으로 괴롭히려하거나 전형적인 복수극의 공식을 뒤집어엎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질 것이다.



(2) 복수대상이 겪는 고통은 복수대상이 저지른 잘못에 비례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음은 답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복수대상을 죽이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닥칠 일을 조금 앞당기는 것뿐이다. 그들의 수명을 줄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난 아직도 <짚의 방패>의 억만장자 영감이 호송중인 손녀 살인범을 죽이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는 뻘짓을 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악당에게 제대로 된 보복을 하려면 그를 종신형으로 감형시키고 교도소 직원이나 동료 죄수를 매수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보라. 백작은 언제든지 그를 샤토 디프로 보낸 악당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사회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처절하게 몰락시키는 길을 택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대상의 공포와 고통은 극대화되고 복수자는 그 과정의 쾌락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복수극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교과서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 복수극을 쓴다는 건 운전면허 없이 자동차를 모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책은 진짜로 재미있다.

나쁜 예로는 <더 파이브>를 보라. 악당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연쇄살인마다. 김선아가 연기한 주인공은 그에게 남편과 딸을 잃었고 2년 동안 고통 속에서 살았다. 과연 그를 '죽이는' 게 그 동안 겪은 고통과 맞먹는가? 김선아는 그를 조금이라도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만드는데 그것이 만약 제대로 작동했다고 해도 죽음의 고통을 몇 분 정도 연장시키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신장에 요석이 있는 환자도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예외는 있다. 서부극이나 무협물의 경우 복수의 방법은 정해져 있다. 서부극의 주인공이 악당을 결투에서 총으로 쏴 죽이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무협물의 경우도 대부분 일대일의 대결을 통한 승리만이 인정된다. 영화가 끝나면 주인공은 왠지 모르게 허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엄격한 게임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장르 세계에서는 복수대상도 패배감이 크다는 것, 그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잔당들을 제압한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관객들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폭력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도 복수대상이 겪는 고통이 죄에 비해 하찮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지만.

뛰어난 이야기꾼은 이 규칙을 적절하게 파괴하는 방법도 안다. <대부 2>의 후반부를 보라. 어른이 된 비토 코를레오네는 가족을 죽인 원수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 원수는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늙은이다. 비토는 칼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노인네를 무참하게 칼로 찔러 죽인다. 그는 이로서 형식적인 복수를 달성하지만 그 행동은 철저하게 무의미하다. 그리고 그 허무함이 <대부 2>라는 영화의 결말이 노리는 것이다.



(3) 복수자는 대상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적어도 그러려는 시도는 해야 한다.

앞에서 내가 <짚의 방패>에 대해 산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무심결에 주변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고통의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하는 가학적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학교 왕따 가해자들은 자신이 피해자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을 온전하게 상상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착한 일도, 나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단지 나쁜 일을 기계적으로 유발할 뿐이다.

복수에 있어서 타인의 마음을 읽고 상상하는 것은 중요하다. 고통과 공포를 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기독교 신자와 무신론자는 전혀 다른 것을 두려워한다. 보통 사람보다 악당들은 공포와 고통을 상대적으로 덜 느낀다. 그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복수가 완성된 경우에도 피해자나 피해자의 가족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여기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밀양>의 전도연이 연기한 피아노 교사이다. 돈 때문에 자기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악당이 감옥에서 쥐꼬리만큼의 고통도 겪지 않고 회개했다며 천국을 기다리고 있으면 미칠 만도 하지.

대상을 아는 것은 대상에게 적절한 처벌을 가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악마를 보았다>의 이병헌 캐릭터는 그걸 못해서 엄청나게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연쇄살인마를 풀어주었다 구타하는 걸 반복하면서 쫓기는 사람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척 봐도 최민식이 연기한 살인마는 그런 일을 겪는다고 특별히 무서워할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는 대부분 악당들이 그렇다. 그렇다면 귀찮게 심리적인 방법을 동원하느니 육체적인 고통을 연장하는 게 낫다. <악마를 보았다>는 이병헌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는 영화지만 최민식에게 최종복수를 할 때 또다시 심리적인 고통을 가하려 한 실수를 저질렀다. 자세히 보면 그 복수는 최민식을 향한 것이 아니라 별다른 죄를 저지르지 않은 그의 부모를 향하고 있다. 최민식은 죽으면 끝이지만 부모는 그 기억을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5) 복수 대상을 제대로 잡는다.

다시 말해 엉뚱한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이다. 쉬운 말 같지만 은근히 실천하기 어렵다. 실생활에서도 사람들은 가해자에게 맞서는 대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폭력이 되물림되고 인터넷 댓글란은 끔찍해진다. 이 나라는 누구에게 맞서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루저들로 넘쳐난다. 영화까지 그래야 하나?

몇몇 복수자들은 개념착오 때문에 엉뚱한 복수 대상을 고르는 실수를 한다. <10억>은 유명한 키티 제노비스 사건에서 영향을 받은 이야기로, 복수자는 영화 속에서 진짜 범죄를 저지른 악당이 아닌 그 주변에서 방관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 하지만 그가 키티 제노비스 사건과 방관자 효과에 대해 조금만 더 공부를 했다면 그들에게 그건 복수를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잊고 진짜 악당들을 상대하는 게 올바른 일이다.

내가 기억하는 복수 이야기 중 가장 끔찍한 사례는 <용서는 없다>이다. 여기서 류승범 캐릭터는 누이의 복수를 한다면서 검시의인 설경구의 딸을 납치하고 불법적인 일들을 강요한다. 나중에 진상이 드러나면 그 어이없음에 화가 난다. 일단 설경구의 캐릭터는 최종악당이 아니라 어쩌다가 말려든 손발에 불과하다. 정 복수를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에너지를 집중해야 하는 건 진짜 악당들이다. 더 나쁜 건 이 복수를 위해 누이가 겪은 일과 아무 상관없는 설경구의 딸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류승범은 누이의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니라 누이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열받은 자신의 복수를 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 설경구의 딸에게 끔찍한 일을 저질러 설경구를 벌하려 한다. 그것도 실제 고통과 죽음보다 소위 순결 이데올로기를 맨 위에 놓고 말이다. 그러면서 그런 류승범을 이해해달라는 영화의 태도는 어이가 없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시사회를 본 멀쩡한 평론가들 중 이 기형적인 사고 방식을 지적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지만. <씨네21>의 편집장이 뒤늦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 문제점에 대해 듣고 그걸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남성적 관점의 한계'를 한탄한 게 전부이다.



(6) 복수보다 중요한 일이 앞을 막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복수보다 그 문제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

<더 파이브>는 여기서 지독한 실수를 저지른다. 영화가 특정 지점에 도달하면, 드디어 범인의 정체와 주소가 밝혀진다. 경찰이 집에 들어가기만 해도 수십 건에 이르는 연쇄살인의 증거가 확보된다. 단지 범인은 행방은 묘연하고 그 와중에도 계속 살인희생자 늘어나고 있다. 척 봐도 주인공들은 이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수가 아니라 잠재적인 희생을 막는 것이다. 그러려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유일한 답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김선아는 계속 복수를 밀어붙인다. 아마 경찰이 체포하면 살인자가 제대로 된 벌을 받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김선아의 원래 계획과 실제로 일어난 '복수'를 고려해보면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범죄자가 정상적인 시스템 안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해보면 김선아의 행동은 거의 안락사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아이들의 복수자인 척 하는 <아저씨>의 원빈이 막판에 괜히 폼 잡느라 쓸데없는 총알을 낭비했다고 믿는다.

원빈이야 내가 알 바 아니고, 중요한 건 김선아다. 어떻게 봐도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범인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이 우선순위는 절대적이다. 신고 대신 사적 복수를 택함으로서 김선아는 용서하기 힘든 간접살인범이 된다. 이런 일을 저지른 주인공을 정상적인 디폴트 복수자로 그리는 것은 엄청난 잘못이다.



(7) 복수는 차갑게 내놓는 음식이다.

이 유명한 경구를 누가 만들어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의미이다. 복수의 미학을 이처럼 정교하게 설명하는 표현은 거의 없다. 복수가 완벽하게 달성되려면 복수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정확한 타이밍을 기다려 최대한 냉정하게 집행해야 한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제외한다면 여기서 가장 모범적인 예는 박찬욱의 <복수 3부작> 중 가장 디폴트 복수극에 가까운 <친절한 금자씨>이다. 금자씨의 복수는 내 취향을 만족시키기엔 지나치게 짧게 끝나지만 그래도 관련된 사람들의 만족도를 고려하면 태도에서부터 구체적인 계획에 이르기까지 거의 최선이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벅차다면 <금자씨>를 보시라.

이 때문에 만족스러운 복수극은 어떤 장르에 속해있다고 해도 자기만의 리듬감을 따른다. 대부분의 경우 복수극은 주인공이 상황의 키를 쥔 순간이 보통 장르보다 빠르며 흐름은 신중하다.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스팅>처럼 그 사실을 위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인공이 영화 내내 죽어라 얻어맞고 막판에야 간신히 살아남아 악당에게 총을 난사한다면 그건 제대로 복수극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로도 좋은 서스펜스물이나 액션물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복수극이라고 주장한다면 사정은 다르다. 다섯 주인공들이 변변치 못한 악당 한 명에게 끝까지 쩔쩔 매다가 영화가 끝날 무렵에 얼렁뚱땅 살아남는 내용인 <더 파이브>도 자신을 '복수극'이라 부르는 걸 포기했다면 훨씬 좋았을 영화이다.

앞에서 복수극은 기본적으로 판타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판타지란 관객이나 독자들이 현실세계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쾌락을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리 그 판타지를 뒤틀어 다른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해도 하나만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상황에서 복수의 쾌락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 천박한 단계를 넘어선 다음에야 복수의 허무함과 같은 보다 고상하고 품위있는 이야기를 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용서는 없다>와 관련된 씨네21의 에디토리얼을 언급할 때, 나는 기억에만 의존해 글을 쓰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에디토리얼이 같은 호에 실렸던 황진미님의 다음 칼럼에 대한 이야기였음을 밝힌다. 내가 허겁지겁 넘겼던 <용서는 없다>의 문제점에 대해 보다 알고 싶으시다면 이 글을 읽어보시길.

http://yiann.tistory.com/336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더 파이브><악마를 보았다><용서는 없다><아저씨><친절한 금자씨>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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