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노무현 前대통령을 싫어했던 사람도 설득하려면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지난 주 영화 <변호인> 언론시사회와 기자간담회의 풍경은 <해리 포터>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81년에 있었던 부림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으니 송강호가 연기하는 '변호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두 알고 있을 텐데, 중반에 어떤 기자가 거의 폭발하듯 이름을 던지기 전엔 아무도 그가 누군지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그 세 이름 글자가 공공장소에서 금지되기라도 한 듯 다들 '그 분'이나 '실존인물'이라고만 언급할 뿐이었다. 보도자료 역시 부림 사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실존인물 모델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는다.

당시 간담회장에서 트윗을 날리고 있던 필자도 특별히 다를 건 없었으니, 필자 역시 이런 분위기에 대해 놀려댈 입장은 못 된다. 여기서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런 특정 영화에 대한 태도가 옳은가, 그른가가 아니라, 영화사측의 협조요청 같은 것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간담회에 참여했던 대부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이런 부분침묵규칙을 지켰던 분위기가 과연 정상적인가, 이다.

게임은 그만 두기로 하자. <변호인>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이야기다. 송강호는 굳이 모델을 흉내내지 않고, 주인공 이름도 송우석으로 바뀌었지만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사전 정보 없이도 그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송우석은 고졸이고,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잠시 판사일을 하다가 때려치우고 부산으로 내려와 세무, 회계 전문 변호사로 일했고, 81년부터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는 실존인물의 경력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단지 영화는 그의 이야기를 일단 허구로 보고 법정 멜로드라마의 틀 안에서 전개한다. 한국 현대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외국관객이라고 해도 <변호인>의 이야기가 친숙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돈과 자기밖에 모르는 속물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사회의 불의를 보고 방향 전환해서 올바른 길을 걷는다는 이 영화의 이야기는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 속에 넣어도 별다른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실존인물과 실화를 모델로 하고 있지만 그 틀 안에서는 굳이 사실일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역시 실존인물을 모델로 한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켰던 비슷한 배경의 영화 <남영동 1985>와 구분된다. <남영동 1985>은 등장인물들에게 가명을 주어도 어쩔 수 없이 구체적인 실화와 실존인물로 돌아가지만 <변호인>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리고 <변호인>이 이 기회를 놓친 것은 실수처럼 보인다.

영화가 재미없다거나 '감동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80년대의 험악한 분위기와 선과 악이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드라마가 결합하면 힘이 센 무언가가 만들어진다. 물론 송강호는 언제나처럼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일반 법정물 장르의 기준으로 보면 법정 장면이 헐거워 보이고 지나치게 신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가 무대로 삼고 있는 시공간이 제대로 된 법정물의 게임이 불가능한 세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 합하면 <변호인>은 단순하지만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이다.

문제는 영화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어느 순간부터 '위인전'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위인전 프리퀄. <젊은 날의 링컨>이나 <모터 사이클 다이어리>를 생각하면 되겠다. 초반에는 입체적인 욕망과 편견, 갈등을 품은 사실적인 인물이 중후반부터 그 사실성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위인전의 지문이 대신하는 것이 보인다. 그래도 본론이 되는 사건이 끝날 무렵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1987년의 에필로그는 주인공에게 불필요한 신화적 후광을 안긴다.



이는 영화의 주제와도 맞지 않다. <변호인>의 이야기는 평범한 변호사가 각성해서 부당한 정권과 맞서 싸운다는 이야기이지, 그가 부산 변호사 동료의 몇십 퍼센트의 존경을 받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무엇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이야기꾼은 종종 주인공에 대한 애정을 접고 냉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애정 자체가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제1원동력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렇게 해야 예술적으로 더 깊이 있는 작품이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무차별적 애정 때문에 이야기의 도구적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 애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애정공세는 별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는 밖으로 열려있어야 한다. 영화를 통해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려는 대상들에게 그런 후광이 도움이 될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변호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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