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태양의 음악 안에 자리한 뜨거움을 감춘 여인 카르멘

[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고양문화재단 오페라 <카르멘>을 처음 봤을 땐 ‘연극적인 오페라’의 디테일한 재미에 빠져들었다. 다시 한 번 <카르멘>을 만났을 땐, 중창과 합창의 묘미에 입 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특히 50여명이 넘는 합창을 긴박하게 몰아가는 3막 합창은 비제의 음악이 왜 ‘태양의 음악’인지를 확실히 알게 했다. 전자는 연출가 양정웅의 파워와 극단 여행자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은 것이고, 후자는 음악의 리듬을 제대로 살려낸 이병욱 지휘자와 TIMF앙상블오케스트라,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주 조역 성악가들, 고양오페라합창단 과 남양주시립합창단 의 뛰어난 기량의 결과였다.

지난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고양문화재단이 선보인 오페라 <카르멘>이 차별점을 지닌 이유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음악과 드라마를 한꺼번에 불러 낸 점. 양정웅 연출가는 기자 간담회에서 “친숙하면서도 낯선 오페라를 만들고 싶다.”고 연출 포부를 밝혔는데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공연된 국립오페라단의 <카르멘>이 회전하는 투우장과 날카로운 창살로 사회의 도덕률과 인물들의 심리가 충돌하고 있음을 드러낸 무대였다면, 고양문화재단의 <카르멘>(무대 임일진)은 salida(출구)가 쓰여진 거대한 벽이 좁혀져오고 열리면서 화해할 수 없는 두 남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르멘의 자유로운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오페라였다. 별이 촘촘히 밝힌 하늘 아래 캠핑카와 텐트로 채워진 3막의 자유스러움은 극 전체 메시지와 맥을 함께 했으며, 밀수꾼들의 이야기를 막을 내려놓고 막간극 처럼 보여준 점은 소소한 재미를 선사했다.



‘강렬한 순백의 도발에 반응하라’는 슬로건처럼 붉은 색의 담배공장 의상에서 순백의 의상, 곧 이어 초록색 의상을 입고 죽음을 맞이하는 카르멘을 다채롭게 불러냈다. 어두운 붉은 색으로 일관했던 대개의 카르멘 색채와는 달라 카르멘이란 인물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갖게 했다. 돈 호세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넘어오게 한 2막의 술집에서 엿 볼 수 있는 초록색 이미지는 마지막 4막에서 카르멘의 의상 색(김도연)으로 또 한 번 탈바꿈한다.

2013 캠핑장으로 건너 온 카르멘과 현대의 군복을 입은 돈 호세, 아이돌로 부활한 에스카미오, 치마를 입고 산맥을 넘는(극중에선 객석을 넘어간다) 용기 있는 여자 미카엘라는 어떤 인상을 남겼을까.

카르멘 김정미는 연기는 물론 유연한 저음을 들려줘 도발적이면서도 날렵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갔다. 또한 카르멘과 돈 호세 어느 하나만 돋보이지 않고 함께 드라마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돈 호세 역 테너 나승서는 공명감 있는 음악은 물론 인생 최대의 사건인 그녀를 만난 호세 캐릭터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엿볼 수 있게 한 성악가였다. 카르멘과의 사랑이 자신은 물론,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로운 여인 카르멘까지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남자의 고집스런 광기가 절절하게 전해져 왔다. 소리의 음색이 매우 서정적인 또 다른 돈 호세 황병남은 인터미션 전과 후 확실히 변화를 주며 사랑에 미쳐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기대 이상의 폭발력과 긴장감은 김정미와 황병남이 보여준 4막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연출가의 해석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기 마련인 오페라에서 양정웅 연출은 주역 '돈 호세'와 '카르멘' 외에도 지금까지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에스카미오'란 인물을 보다 애정 있고 입체적으로 바라본 듯하다. 에스카미오는 팬들의 엄청난 환호와 보디가드의 경호 속에서 세그웨이를 타고 멋지게 등장하는가하면, 집시무리들에게 돈 다발을 던져놓고 가기도 한다. ‘투우의 종결자'란 자막에서도 느껴지듯 두 명의 에스카미오는 유명 아리아 ‘투우사의 노래’에서 박경종과 김재섭 모두 엄청난 마초로 그림을 그려냈다. 남성 호르몬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우렁찬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사라진다. 물론 음악적으로 보자면 과하게 내지르는 인상도 없지 않아 있었다.

캠핑카와 인디안 식 텐트를 사이에 두고 호세와 칼 싸움을 벌이는 에스카미오, 마지막 투우 경기를 앞두고 카르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에스카미오의 기자회견 장면은 성악가별로 조금 느낌이 달랐다. 실시간으로 카르멘과 에스카미오의 얼굴을 클로즈 업 시켜 보여주는 장면에서 박경종은 강한 남성미를 절대 놓치지 않는 투우사란 인상을 줬다면, 김재섭은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에스카미오의 순정을 잠시나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객석의 인기 이상으로 더 값진 게 연민이라고 할 때 새로운 투우사의 발견이었다. 사랑스러운 두 명의 소프라노 정성미 서활란(미카엘라) 모두 맑고 안정된 고음을 들려줬다.



주역들의 존재감 이상으로 젊은 성악가들의 실력이 돋보인 오페라였다. 메조소프라노 양계화 김주희(메르세데스), 소프라노 홍지연 성재원(프라스키타), 테너 류기열 곽지웅(단카이로), 테너 윤상준 문대균(레멘다도), 베이스 이두영(주니가), 바리톤 최영길(모랄레스) 모두 한명 한명 애정을 담아 이름을 불러주고 싶을 정도였다.

고양문화재단 오페라 <카르멘>이 스펙타클한 무대 장치 혹은 외국의 유명 크리에이티브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미리부터 기대감을 낮췄던 관객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꼭 엄청난 유명세와 예산을 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오페라의 재미는 만끽할 수 있다. 참여하는 성악가와 스태프 모두의 진정성과 예술적 노력이 먼저이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이번 <카르멘>은 2013년 관객들의 눈보다는 마음을 훔친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오페라였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고양문화재단, 정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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