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길’ 어설픈 분노에 기댄 안일함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집으로 가는 길>은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전도연이 주연을 맡고, 방은진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로, 2004년에 실제로 벌어졌던 ‘장미정 사건’을 소재로 한다. 장미정 사건은 한국의 가정주부 장미정씨가 파리 근교공항에서 마약 34Kg이 든 가방을 들고 통과하려다 프랑스 당국에 의해 마약운반 현행범으로 체포된 뒤,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카리브 해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2년 만에 귀국한 사건으로, 2006년에 인터넷과 <추적60분> 등을 통해 사연이 알려지면서 당시 외교공관의 안일한 일처리가 도마에 올랐던 사건이다.

영화는 일단 특이한 실화를 소재로 삼고 있어서 사연이 무척 흥미롭다는 장점을 지닌다. 게다가 주연을 맡은 전도연의 연기야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하지만 장점은 거기까지이다. 연출은 그저 사연을 소개하고 사건을 순서대로 나열하는 전개를 취하기 때문에, 재연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밋밋하다. 그 결과 130분이 넘는 상영시간이 오직 익히 알려진 결말에 이르기 위해 참아야 하는 지루한 시간이 되고 말았다.

영화의 만듦새를 깎아먹는 결정적인 요인은 영화가 사건에 대한 다각적이고 심층적인 접근을 포기한 채, 당사자의 진술에 의존하여 지극히 자기 방어적인 태도에 함몰되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기막힌 사연’에 감정이입을 하며, 외교공관의 관료적인 일처리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사건에 대한 입체적인 분석이나 객관적인 조망이 부재한 탓에, 비판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유치한 희화화나 감정적인 비난으로 흘러버린다. 영화는 외교공관의 관료주의를 고발하겠다는 의도와 엄청난 위기 속에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가족애를 통해 가족과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겠다는 의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두 개의 상이한 의도를 어설프게 섞어버리는 어중간한 태도를 보인다.



◆ ‘억울함’만 남고, 사건의 실체는 빠져있어

영화는 송정연(전도연)이 파리근교의 공항 검색대를 불안스럽게 통과하다가 “마담!”하고 부르는 소리와 함께 적발되는 모습이 담긴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타이틀이 뜨고 나면, 2004년 송정연이 자동차 정비소를 하는 남편(고수)과 함께 단란한 일상을 보내는 장면과 남편의 후배들이 방문하는 장면이 잠깐 나오고, 불과 몇 장면 만에 남편의 빚보증으로 가정 경제가 위기를 맞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수리남에서 파리까지 원석을 운반해주면 400만원을 주겠다는 남편후배의 제안에,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던 송정연이 혼자 쪽지를 써놓고 떠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곤 다시 프롤로그에 등장했던 공항에서의 적발 장면이 이어진다. 송정연은 코카인이 가득 든 큰 가방과 함께 체포되고, 이후 송정연이 프랑스 사법당국에 구금되는 사연과 국내에 있는 남편이 아내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과 한국 외교공관의 어이없는 일처리 등이 그려진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한국의 평범한 가정주부가 국제 마약 운반범으로 ‘오인’받다니 기가 찰 노릇이요,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모른 채 사소한 죄를 짓긴 했지만 신속하고 정당한 재판절차를 통해 ‘누명’을 벗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한국 외교공관의 무사안일주의로 인하여 생고생을 한 아주 ‘억울한’ 사연이라는 점에 맞추어져 있다. 이 와중에 주인공의 구명운동에 적극 나서준 한국 네티즌들의 활약은 빛났고,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한 부부의 사랑은 놀랍다는 식이다. 영화가 부여한 사건의 성격이나 평가는 이렇게 고정되어 있으며, 영화를 통해 사건을 다르게 읽을 여지는 없다. 하지만 사건을 이렇게 고정된 시각으로 보도록 하는 영화의 태도는 올바른 것일까.

사연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평범한 가정주부’와 ‘국제마약 운반범’ 사이의 어마어마한 간극을 느끼면서, ‘오인’, ‘누명’, ‘억울’이란 말에 자연스럽게 공감할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평범한 가정주부가 국제 마약 운반범으로 ‘오인’되는 ‘억울한’ 일이 일어난 것인지 당연히 궁금할만하다. 사건을 영화화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과정을 거쳐 ‘평범한 가정주부’가 ‘국제마약 운반범’으로 옥살이를 하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면서, 사건의 성격에 관해 관객이 직접 판단하도록 하는 게 옳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은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영화는 송정연의 가정경제가 어려워지는 것과, 원석운반에 대한 제안을 받고 혼자 떠나는 장면을 곧바로 파리근교 공항에서 체포되는 장면과 이어 붙인다. 그러니까 그 사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송정연의 행위는 관객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 영화는 왜 핵심적인 열흘간의 행적을 그리지 않는가?

실제사건에서 주인공은 2004년 10월 20일 다른 일행 3명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카리브해 연안의 가이아나를 거쳐 수리남에 도착하고, 10월 30일에 또 다른 공범과 함께 코카인이 가득 든 두 개의 큰 가방을 들고 가이아나 공항을 출발하여 파리근교 공항에 도착하여 가방과 함께 검색대를 통과하려다 체포된다. 그런데 영화는 가장 핵심적인 열흘간의 행적을 전혀 그리지 않는다.

가령, 해외여행 경험도 없는 송정연이 ‘원석 밀수’라고 알았던 불법적인 일을 하기 위하여, 깊이 알지도 못하는 일행들을 만나 함께 출국을 하고, 완전히 낯선 풍광의 가이아나에 도착하여 말로만 듣던 수리남까지 들어가고, 그곳에서 또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 큰 가방을 전달 받고, 잘 모르는 남자와 함께 큰 가방을 들고 가이아나 공항을 통과하여 파리 행 비행기에 오르고, 파리 근교 공항에 도착하여 검색대를 통과하기까지 매순간 얼마나 긴장되고 얼마나 겁이 나며, 온갖 불길한 생각과 의심들이 뇌리를 스쳤는지에 관해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송정연이 집에서 나가는 장면과 파리 근교 공항에서 국제 마약 운반범으로 체포되는 장면을 이어붙임으로써, 그의 체포가 완전히 생뚱맞고 황당한 날벼락인 양 그린다. 심지어 4개월 후 송정연이 카리브 해의 감옥으로 이감되는 장면에서 영화는 마치 송정연이 가이아나라는 장소를 처음 와보는 것처럼 그린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영화는 사건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나 영화의 재미를 돕기 위해서나 가장 백미에 해당될 중간과정을 왜 모두 생략해버리고, 사건으로 파생된 이후의 사연에 집중하는 것일까. 영화의 전개 상 건너뛰기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송정연이 2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나는 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혹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등을 곱씹으면서, 짤막짤막한 회상장면을 통해서라도 열흘간의 행적의 일부가 담기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영화가 그 과정을 완전히 누락시키는 이유는 영화가 주인공의 서술에 의존해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주인공의 주관적인 입장에 그대로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배제시킨 ‘그 날의 기억들’이 통째로 날아갔다. 영화는 송정연이 왜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게 되었는지 그의 딱한 사정을 먼저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마약운반인줄은 꿈에도 몰랐음을 강조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그의 옥살이가 억울하게 길어지는 과정과 외교공관의 잘못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가 “내가 돈을 벌겠다는 욕심과 무지에 의해 죄를 지었다”고 최후 진술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영화의 흐름은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태도와 매우 닮아있다.

일반적으로 범죄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 자신의 행위를 조목조목 되짚으며,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게 내가 왜 그런 행위를 하게 되었는지를 먼저 변명하거나,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거나 다른 이에게 완전히 속아서 한 짓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고,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확한 진술 없이 ‘내가 어리석었다’ 거나 ‘내가 잠시 유혹에 빠져서’, ‘다 내가 부족한 탓’ 등으로 뭉뚱그려 말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일종의 자기 합리화에 해당되는 방어기전으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의식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스스로 무고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도 일어난다.

영화는 당사자가 취하는 방어적인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쫓으면서, 사건의 객관적 실체에 대한 접근을 놓치고 있다. 영화가 사건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키고자 했다면, ‘평범한 가정주부’와 ‘국제 마약 운반범’ 사이에 놓여있는 중간항들을 고찰했어야 한다. 즉 마약인줄은 몰랐지만 ‘밀수라는 범죄에 가담한 주인공’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거나, 수사당국이라면 마땅히 관심 가졌을 만한 사안인 어떻게 ‘평범한 가정주부’가 ‘국제 마약 운반범’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갖게 되었는지, 즉 송정연의 남편은 주범인 후배와 언제 어떻게 어떤 관계로 알고 지내왔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설명을 통째로 누락한다.

물론 영화가 반드시 수사관의 입장에서 만들어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영화가 사건의 객관적 실체를 담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주인공의 방어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며, 주관적인 ‘억울함’만을 강조할 때, 그 ‘억울함’의 실체는 모호해지고 만다. 영화는 그의 ‘억울함’에 외교공관의 관료주의를 함께 엮어서 비판하는데, 사건에 대한 영화의 불철저한 재현은 외교공관에 대한 비판마저 힘을 잃게 만든다.



◆ 제대로 된 비판이 아닌 희화화

실제사건에서 05년 11월 외교공관이 재판 서류를 송부하는 과정에서 누락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 실수는 실제보다 부풀려져 있다. 외교부의 해명자료에 따르면, 먼저 05년 7월에 주범에 대한 한국의 수사결과를 알리는 서한을 현지 수사판사에게 송부하였고, 05년 11월에 주범에 대한 판결문을 번역하여 송부하는 과정에서 유실이 일어났는데, 약 4개월 뒤인 06년 3월에 현지법원이 못 받았음을 인지하고, 즉시 팩스로 재송부 하였으며, 06년 6월에는 현지를 방문하여 사본이 원본과 다름없음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다고 한다. 현지에서 재판이 열려 주인공이 석방된 것은 그 후 5개월 뒤인 06년 11월이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외교공관이 서류를 누락한 실수는 4개월 보다 훨씬 오랫동안 인지되지 못한 채 방치되었으며, 이것이 주인공의 긴 억류기간을 결정지은 주된 요인인양 그려져 있다. 또한 외교공관의 관료들은 마치 아침드라마나 개그프로그램의 인물들처럼 필요이상으로 희화화되어 있다. 외교공관이 자국민 보호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했고, 일처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필요한 비난이나 분노로 소진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영화는 무사 안일한 정부를 비판하여 움직이게 만든 ‘네티즌의 힘’을 매우 긍정적으로 그린다. 그러나 사회문제에서 ‘선한 네티즌’대 ‘나쁜 정부’를 단순히 대립시킬 수 있는지도 의문이며, ‘네티즌’의 움직임을 우호적으로만 그리는 영화의 태도도 매우 순진하고 일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긴 말 필요 없다. 지금까지 <집으로 가는 길>을 비판한 요지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은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를 보고 <집으로 가는 길>과 한번 비교해보기 바란다. 인권영화 프로젝트 <여섯 개의 시선>(2003)에 묶여있는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28분짜리 단편 영화로, 1993년에 네팔에서 온 여성노동자가 정신질환자로 오인되어 6년 4개월 간 한국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실제 사건을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형식에 담는다.

영화는 사건에 대한 다층적인 시각을 입체적으로 풀어내며, 누구도 악인은 아니지만 엄청난 인권유린이 발생할 수 있는 관료시스템의 본질과 한국 사회의 진풍경인 ‘무관심’을 통하여 관객들을 진심으로 각성시킨다. 무려 10년 전 영화이지만, 사건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을 포기한 채 당사자의 주관적 진술에 따르는 재연 드라마적 전개로 어설픈 눈물과 섣부른 분노에 기대는 <집으로 가는 길>의 안일한 태도와 어떻게 질을 달리 하는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집으로 가는 길> 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