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따뜻한 색, 블루’ 예상보다 파격적이지 않은 이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영화의 한 장면 이야기를 해보자. 보다 정확히 이야기해보면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1부 중반에 나오는 장면 이야기다.

칸 영화제에 이 영화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가장 화제가 되었던 건 바로 이 12분짜리 장면이었다. 칸 영화제에 들어갈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이미 온갖 종류의 자극적 묘사에 익숙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이런 장면은 전에 없었다며 온갖 호들갑을 떨고 있었으니 당연히 궁금해진다.

그리고 걱정도 된다. 그런 장면이 한국의 등급시스템, 곧장 말해 아직 가위손이 퍼렇게 살아있는 한국의 간접적인 검열 시스템을 통과할 수 있을까? 이 영화의 국내 제목이 아직 <아델의 이야기 1부와 2부>이던 때 부산 영화제와 씨네큐브 프리미어 페스티벌의 사이트에서 예매버튼을 우다다 누르고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생각이었을 거다. 나 역시 양쪽 모두였다. 기자 시사회를 기다리다 결국 <홀리 모터스> 꼴이 나면 어떻게 해?

예상 외로 영화는 삭제없이 상영된다고 한다. 이해가 된다. 한국 검열 의식은 철저하게 남성 공포증에 바탕을 둔다. 모 가위질 선생이 "이렇게 나가다가는 남성의 마지노선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탄했던 옛날이 기억난다. 물론 이제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 선을 넘었어도 세상은 안 망했다. 하지만 남성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며 <홀리 모터스>에서 드니 라방이 끼고 나왔던 가짜가 국내 상영 때 안개 속으로 사라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된다. 노출 장면에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 전에 수입되었다는 <호수의 이방인>이 진짜로 걱정되긴 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의미와 기능에 검열 감각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데, 이건 굉장히 추상적이다. 게다가 이 영화에서처럼 두 배우의 몸이 내내 꽈배기처럼 얽혀있는 경우에는 어느 부분을 자르려 해도 그게 참 어색하다.



그럼 검열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장면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이 영화의 문제장면은 12분 정도 걸린다. 엄청 길다. 누구누구는 너무 길어서 헛웃음이 나오고 다 끝나니까 지치고 배고팠다고 하더라. 하지만 <파란색은 따뜻하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원작 만화에서 그 신은 4페이지짜리이며 다른 페이지의 노출까지 더하면 영화와 거의 맞먹는다. 그리고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79분이다. 12분의 신이 끝나도 다른 이야기를 하는 167분이 남아있다.

길이는 넘어간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일단 원작자인 쥘리 마로가 좋아하지 않았다. 마로는 묘사의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마로의 비판 이후 이 부분은 이 영화에 대한 가장 묵직한 비판 도구가 된다. 그럴 거라면 <바운드>를 찍을 당시 워쇼스키 형제가 그랬던 것처럼 전문가를 불러올 걸 잘못했나?

하지만 이게 그렇게 만만한 비판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본 수많은 관련자들이 그 비판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생각해보라. '어떤 것이 올바른 사랑인가?' 결국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의 경험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며, 세상에는 우리 경험을 넘어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올바름과 정확함을 말하기엔 너무 넓은 영역이다.

그리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장면에서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이 장면이 생각만큼 쾌락을 자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무척 적나라하긴 하다. 하지만 두 배우는 굉장한 에너지가 들어가는 중노동을 하고 있거나 또는 복잡한 현대무용을 실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트위터에서 "처음이라 무리했나보다"라고 말을 던졌는데, 농담이 아니었다. 영화가 그린 건 이들의 첫 사랑이었고 그 중 한 명은 첫 경험이었다. 모두 긴장하기 마련이며 최대한 노력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장면 곳곳에 들어가 있는 배우의 어색함이 오히려 사실적이라고 생각했고 많이들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관객들은 그 긴장감 속에서 캐릭터의 진실을 읽었을 것이다.

7,80년대 이후 LGBT 영화들은 긴 길을 걸어왔다. 그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도 실컷했으며 수많은 스테레오타이프를 부수었으며 미지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여전히 만족스러운 영화가 부족하다. 하지만 수많은 수작들이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고 <가장 따뜻한 색, 블루>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라고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다양한 비판과 지적은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비판이 너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반응이라면 비판 자체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모든 것들이 이전처럼 단순하지 않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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