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그녀’ 발칙한 상상에 드는 몇 가지 의문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수상한 그녀>는 심은경의 연기에 의존한 명절용 가족코미디이다. 할머니를 꽃처녀로 되돌리는 판타지를 통해 노인의 소외를 환기시키고, 70년대 가요를 통해 복고와 향수를 일깨우는 이 영화의 기획은 영리해 보인다. 경력에 걸맞지 않게 원톱으로 영화를 이끌어나가는 심은경의 매력은 충분히 돋보이고, 공연무대를 통한 재미는 <미녀는 괴로워>에는 못 미치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문제는 이 영화가 지닌 안이하고 반동적인 정서이다. 영화는 노인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지만, 정작 노인의 욕망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영화가 재현하는 것은 노인에게 투사하는 젊은이의 욕망이다. 영화의 무의식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불편한 갈등은 알아서 해소되고, 할머니든 어머니든 언제까지 모성의 존재로 남아서 하릴없는 청춘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길 바라는 손자의 욕망을 담고 있다.

◆ 장한 어머니, 징한 시어머니

<수상한 그녀>는 템포가 느린 코미디이다. 그녀가 꽃처녀가 되기 전 할머니(나문희)로 나오는 분량이 생각보다 많다. 그 분량을 통해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꽤 많이 설명된다. 그녀는 아들을 잘 키운 ‘장한 어머니’로서의 자부심이 쩌는 할머니이다. 남편도 없이 혼자서 아들(성동일)을 국립대 교수로 키웠으니 자랑할 만도 하다. 그는 그 자랑을 다른 노인들과 며느리에게 풀어놓으며 자기존재를 확인한다. ‘징한 시어머니’로서 잔소리 쩌는 할머니인 것이다.

영화는 그녀를 ‘주인 아가씨’로 부르며 평생 사모하는 이웃 할아버지(박인환)를 통해 그녀의 출신을 보여주는 한편, 갑작스러운 드잡이 질을 통해 그녀의 청춘이 순탄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드잡이 질이 그녀의 위신을 근본적으로 망가뜨리지는 않는다. 가령 <불어라 봄바람>에서 남편의 축첩으로 일생 상처받았던 것처럼 나오던 어머니가 사실은 그 자신이 첩이었다는 반전은 주인공과 관객의 의식을 전환시키는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수상한 그녀>에서 밝혀지는 그녀의 과거사는 그녀에게 부과된 모성의 가치를 훼손하기는커녕 강화시킨다. 그녀는 과거사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으며, 영화 역시 그런 그녀를 용인한다. 즉 그녀는 정말로 어렵게 아들을 키워 성공시킨 ‘장한 어머니’로 추인되는 것이다. 영화는 ‘장한 어머니’이자 ‘징한 시어머니’가 일으키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충분히 고찰하지 않는다.

영화는 ‘징한 시어머니’인 그녀가 어떤 갈등을 일으키는지 보여준다. 시어머니의 잔소리로 며느리가 병에 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집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곳에서 더 이상 함께 살수 없는 존재가 된다. 바로 그때 판타지의 문이 열린다. 그녀가 스무살 꽃처녀의 몸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녀(심은경)는 이웃 할아버지의 집에 머물면서 손자(진영)의 밴드에 합류하여 보컬리스트로 활약한다. 또한 음악방송 PD(이진욱)와 설레는 마음을 갖는다. 영화는 그녀가 꽃처녀의 몸으로 돌아가 일으키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코미디로 엮으며, 공연장면을 통해 시청각적 쾌감을 더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상은 몇 가지 의문을 품게 한다.



◆ 할머니의 의식에 꽃처녀의 몸인데 왜 보수적일까

첫째, 꽃처녀의 몸으로 돌아간 그녀는 왜 여전히 이웃 할아버지와 만나고, 가족 주위를 맴돌며, 성적 욕망 앞에서 주저하는가? 영화는 그녀가 요즘 젊은이의 정서가 아니라, 보수적인 70대 노인의 성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그녀는 수줍은 스무살의 의식이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의 의식을 지닌 꽃처녀이다. “남자는 처자식 안 굶기고 밤일만 잘하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섹슈얼리티를 긍정하는 그녀가 무엇이 두려워 음악 PD와의 관계에 몸을 사리는가.

일본영화 <비밀>에서 딸의 몸을 갖게 된 중년여성은 여고생의 몸에 걸맞은 욕망을 밀고 나가기 위해 십여 년간 딸인 척 남편을 속인다. 그러나 <수상한 그녀>에서 꽃처녀의 몸으로 돌아간 할머니는 여전히 모성적인 존재로 가족주변을 맴돌고 끝끝내 무성적인 존재로 남으며, 다만 못 이룬 가수의 꿈을 펼치는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는 여성-노인의 다채로운 욕망을 모성애와 온건한 자아실현의 욕망 안에 가둔다. 이는 심은경-나문희 캐릭터의 욕망을 과소평가한 것이거나, 똑바로 보기를 회피하는 태도이다.

영화는 여성-노인의 욕망이라는 화두를 꺼냈다가 끝까지 밀고나가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적 금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모성적 존재로 봉합해버리는 젊은이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여기서 젊은이는 영화 속 손자이거나, 감독이거나, 관객이다. 영화는 그녀가 청춘의 새 삶이 아니라 할머니로서의 일생을 긍정하며 희생을 택하는 것을 클라이맥스로 삼는데, 그녀의 선택은 이미 영화의 보수적인 서사 속에 내장된 것이어서 새삼스럽지도 않다.



◆ 고부갈등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

둘째, 영화 초반 갈등의 핵이자, 판타지를 불러온 결정적 계기였던 며느리와의 갈등은 왜 아무런 진전 없이 슬그머니 폐기되는가? ‘징한 시어머니’인 그는 꽃처녀가 된 후로도 아들이나 며느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바뀐 몸을 하고서도 습관처럼 며느리에게 잔소리를 하고 아들에게 ‘우쭈쭈’를 한다. 그는 끝까지 왜 며느리가 병이 났고, 자신은 며느리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돌아보지 않는다. 영화는 그녀의 아들 사랑이 어떤 문제를 낳고 있는지 깊게 성찰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녀의 아들 사랑이 옳은 것이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며느리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시선을 견지한다. 영화는 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아들 사랑과 시어머니 노릇이 며느리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전체 사회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재고되어야 할 문화지체현상이라는 점을 사고하지 못한다.

그녀는 다시 노인이 된 뒤에도 예전과 똑같이 며느리를 대하며 집에 들어가 산다. 회춘의 비밀은 이웃 할아버지와 아들에겐 알려지지만, 며느리에겐 끝내 알려지지 않는다. 할머니의 회춘은 손주들에게 큰 혜택을 남기지만, 며느리에겐 아무런 혜택도 없다. 며느리는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을 뿐 서사에서 완전히 소외된다. 며느리의 입장에서 그녀는 마치 시위하듯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것일 뿐이고,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 변화도 없다.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났을 뿐이니, 며느리의 병은 언제든 도질 수 있지만, 영화는 신경 쓰지 않는다.

<수상한 그녀>는 애초에 고부관계를 갈등의 핵으로 다루면서도, 며느리와 시어머니라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손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는 것이었다. 즉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있는데,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고, 엄마가 참든 할머니가 참든, 둘이 알아서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는 피상적인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지만, 할머니와 엄마가 사이좋게 손주들을 응원하는 것으로 훈훈하게 마무리할 수 있다. 손자의 입장에선 ‘할머니도 좋고, 엄마도 좋다. 둘 다 내겐 모성적인 존재이니까.’ 이런 유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고부 갈등이 다뤄졌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 할머니의 희생으로 손주들의 일자리 찾기?

셋째, 여성 보컬은 왜 아무리 독보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어도 결국 소모품처럼 다루어지는가? 그녀는 요즘 보기 드문 ‘소울’이 있는 목소리에 독특한 매력으로 반지하 밴드를 주목받는 신인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녀가 합류한 밴드는 과연 현실에서도 그런 언밸런스하면서도 복고적인 음악을 하는 밴드가 있다면 주목받을 것 같은 기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지리멸렬하던 반지하 밴드가 인기를 끌게 된 건 오로지 그녀의 힘이며, 마지막 무대에서 리더인 반지하 없이도 훌륭하게 공연을 마친다. 그러나 그 밴드는 오두리 밴드가 아니라 반지하 밴드이다.

오두리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뒤, 그 자리는 손녀인 반하나(김슬기)로 대체 된다. 오두리는 반지하 밴드를 띄우고 사라진 밑밥이었고, 반지하는 리더이자 작곡가로서 오두리 없이도 승승장구한다. 오두리가 없어도 그 밴드는 관객과 방송관계자들의 사랑을 변함없이 받을 수 있었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문화예술계에서 여성 가수나 여성 배우는 비상한 매력과 예술성으로 인기 돌풍을 일으키더라도 수명이 짧으며, 예술을 생산하는 산업과 구조에 깊이 관여하지 못함으로써 어느 순간 소모품으로 내쳐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것은 서글픈 현실이지만, 영화에선 신인가수 오두리의 희생이 손자와 손녀를 위한 것이니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그려진다. 영화 속 오두리의 희생과 양보는 여성의 사회적 희생과 양보를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보이게끔 하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오두리의 희생은 어쩌면 노인세대가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는 젊은 시절의 에너지를 징발해서라도 젊은이들에게 꿈을 펼칠 자리를 마련해주길 바라는 젊은이의 판타지로 읽히기도 한다. 가령 창의력이 고갈되어 있는 문화콘텐츠 시장에서 노인세대의 문화적 에너지인 복고 콘텐츠를 통해서라도 시장을 활성화시켜 젊은이들의 고용이 창출되길 바라는 속내가 읽히는 것이다. 할머니의 회춘을 상상하면서도, 그것이 할머니의 자유로운 욕망의 구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와의 진정한 화해를 위한 것도 아니며, 오직 출구 없는 손주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는 빈곤한 시대의 무의식에 안쓰러움이 밀려온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수상한 그녀>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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