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귓가에 쟁쟁한 ‘정도전’의 한 마디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드라마 찬(贊)△. 당신은 정도전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연 개국공신이지만,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역신? 조선의 설계자였으나, 조선시대 내내 역적으로 몰려 있다가, 고종 때가 되어서야 복권된 비운의 정치가? 아주 오래전 사극 <용의 눈물>에서 뭔가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졌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에서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신하의 나라여야 한다”는 ‘밀본 사상’의 수괴로, 그의 추종자들이 한글 창제를 반대하게 했다는 비밀 테러조직의 정신적 지주?

정도전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정몽주만큼 충신이 아니어서 역성혁명을 주도한 것도 아니었고, 이방원에게 단순히 정치적 배신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왕조 개창은 단순히 왕조를 바꾸는 정권찬탈의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권력주체들이 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근원적인 개혁을 위해 새 왕조 개창까지 나아간 일종의 혁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온건 개혁파와 급진 개혁파의 충돌이 일어나, 함께 개혁을 주도하였으나 온건파에 머물렀던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다.

또한 정도전이 창안한 조선은 군주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하와 제도로 왕권이 제한되는 관료정치 체제였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군주정치 체제를 수립하려 한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제거할 수밖에 없는 사상가였다. 따라서 정도전은 조선의 근간이 되는 토지제도와 법률제도는 물론이고 경복궁의 누각이름까지 손수 지은 ‘시스템의 설계자’였지만,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고 조선시대 내내 최고의 사상범으로 남아 있게 된다.

요컨대 정도전은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잠시 권력을 잡았다 숙청된 정치가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체를 창안한 혁명가이자, 새로운 정치사상을 유포한 사상가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맹자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민본사상이었다.



◆ 고려 말, 구 정치 세력과 새 정치 세력의 대립

KBS 정통사극 <정도전>은 조선왕조 개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존의 드라마들이 다루어왔던 방식인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권력 찬탈의 과정이 아니라, 정도전과 신흥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의 과정으로 재조명하려는 드라마이다. <정도전>은 도입부에서 정도전이 함경도 국경지대의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가는 장면을 그린다. 전쟁으로 살육된 백성들의 시체 위에서 그는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하늘은 오래전에 고려를 버렸다”며 읊조린다. 드라마는 다시 9년 전인 공민왕 시해직전으로 돌아가, 두 정치세력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과 권문세족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혁정치를 시도하였으나, 신돈과 노국 공주의 사망으로 개혁이 좌초된 뒤 자포자기에 빠진다. 그러나 신흥사대부들을 중용하고 성균관을 중흥시킨 덕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형성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색의 문하생들로,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관료인 이들은 강한 신념과 결속력으로 집단행동을 불사하였다. 이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권문세족들과 달리, 지방 향리나 중소지주 등 중간계층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원-명이 교체되는 국제정세에서 친명 외교를 주장하였다. 정도전은 신흥사대부들 중 가장 강경하게 권문세족들에게 맞선 인물이었다.



한편 이인임으로 대표되는 권문세족들은 전쟁위기도 불사하며 친원 노선을 내세운다. 이인임은 병권을 쥐고 있던 최영에게 친원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자주를 꾀할 수 있다는 그럴듯한 균형자론을 피력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려의 자주나 안보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다. 이인임은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막히게 알아내어 설득을 이끌어내는 능란한 지략으로, 공민왕의 유지를 조작하여 어린 우왕을 왕좌에 앉히고, 최영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신흥사대부들을 핍박하고, 수렴 청정하는 태후를 겁박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구가 쳐들어와 관군을 보내야 하는 화급한 민생 현안을 앞에 두고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의 행태는 현실정치의 잔상과 맞물려 오싹한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이인임은 신념과 명분에 입각하여 좌충우돌하던 정도전을 귀양 보내고, 의리로 뭉쳐 단체행동을 벌이던 신흥사대부들을 궤멸시킨다.

◆ 정도전과 이성계

핍박을 받은 사대부들은 대부분 고분고분해졌지만, 정도전의 경우 핍박은 전혀 다른 사고의 지평을 열게 하였다. 정도전은 귀양지에서 글로만 접하던 진짜 백성을 마주하게 된다. 신흥사대부로서 그는 친명정책이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백성의 입장에서는 누구와 화친을 맺고 누가 왕이 되는 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성리학자인 그는 미신이나 불교가 아니라 합리적인 유교철학이 옳다고 확신했지만, 그들에게 종교는 필요로서 요청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명분이나 이념이 아니라, 문란해진 토지제도로 인해 소출의 8-9할을 여러 명의 중복된 지주들에게 세금으로 빼앗겨 먹고 살 것이 없다는 것이었고, 왜구가 침입해 와도 보호해줄 관군이 없어서 학살과 노략질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고려 백성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백성들과 함께, 9년의 유배와 유랑 생활동안 고려말의 혼란상을 온몸으로 겪는다. 그는 관리의 핍박을 겪고, 왜구의 침입을 당하며, 철거민 신세가 되어 쫓겨 다닌다. 10회까지 방송된 드라마는 정도전이 아직 유랑생활 중에 있는 우왕 6년의 시기를 그리고 있지만, 앞으로 유배생활에서 체험한 기층민의 삶을 통해 그의 사상이 영글어지는 과정과 3년 후 이성계를 만나 역성혁명에 가담하여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을 그릴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에는 지금까지의 사극과는 다소 다른 모습으로 이성계를 그린다. 그는 인맥으로 뒤얽힌 고려 조정에 인연이 없는 우직한 변방의 장수로, 거친 함경도 사투리와 개성의 주류문화에 전혀 어울리지 못하는 이질적이고 토속적인 태도를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이지란을 비롯해 이성계를 따르는 부하와 그의 군대는 고려관군의 모습과는 달리 훨씬 야성적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전주 이씨라는 것은 조선시대 내내 강조된 것이지만,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는 전주에서 이주했다고는 하나 여진족 거주 지역에서 목축업을 한 유목민이었고,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여진족 거주지인 쌍성총관부를 고려가 원나라에서 되찾아올 때 이 지역 토호로서 고려군과 내통하여 고려에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성계는 아버지의 공로로 고려 무장으로 등용된 여진족 청년이라는 가설이 존재한다. 드라마는 이러한 역사적 논의들을 부인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이성계를 아버지 대에 이르러 원나라에서 귀화한 자로 묘사하면서, 고려의 권문세족들이 그에 대해 품고 있는 경계심을 “고려를 ‘선택’한 자이기 때문에, 충성심을 믿을 수 없다”는 말로 설명한다.

조선 왕조의 시조인 이성계의 태생이 여진족일 가능성을 드라마에 표현하는 것은 기존의 단일민족 신화 중심의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곤혹스러운 일이다. 2012년에 방송된 SBS의 사극 <대풍수>에서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학설이 그려진 적이 있지만, 드라마가 인기를 끌지 못하고 종영되어 큰 파장을 끌지는 못했다. 따라서 KBS 정통사극인 <정도전>에서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학설을 받아들이는 것은 꽤나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설정이다. 이성계가 여진족 출신이든 혹은 고려유민으로 원나라에 흡수되었다가 재귀화한 자이든, 그의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기존의 민족주의 사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새로운 것임에 분명하다.

조선왕조의 개국은 정치낭인이 되어 기층민과 더불어 박박 기는 삶을 살아내며 국가의 존재이유를 반문하였던 정도전과 전쟁의 참화 속에 무참히 도륙당하는 백성들을 보며 눈물짓던 변방무장이 만나서 이룬 혁명이다. 비록 혁명의 과정에서 온건파의 반대에 부딪혀 정도전이 꿈꾸었던 ‘백성의 수에 따라 토지를 나누어주는’ 토지제도는 실행해보지도 못하였지만,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정도전의 민본사상과 백성의 삶이나 나라의 존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기득권만 지키고자 애쓰는 세력들에 의해 돌아가는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를 창안해내는 혁명정신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난세를 끝장내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도전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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