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 섣부른 증오에 빠지지 않는 미덕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 반도체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삼성을 상대로 6년간 법정투쟁을 벌여 산업재해 판정을 얻어낸 실화를 담은 극영화이다. 대기업의 투자를 받지 못해 1만 여명의 후원자들의 참여만으로 제작비 10억원을 마련하여 만들어진 끝에,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또 하나의 가족>이란 제목으로 상영해 관객과 외신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일반관객과 만나는 것은 순탄치 않다. 국내 상영관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대기업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개봉을 앞두고 상영관 수를 대폭 축소했다. 예매관객들에게 상영 취소를 통보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고, 결국 <또 하나의 약속>은 지난 2월 6일 전국 169개 스크린에서 개봉했다. <남영동 1985>도 308개의 스크린에서 개봉하였고, <또 하나의 약속>의 예매률이 동시 개봉작들 중 1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대 광고주인 삼성의 외압이 있었거나 눈치 보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상영관을 늘려달라는 관객들의 청원으로 개봉 후 상영관이 다소 늘어나긴 하였지만, 여전히 200개미만의 스크린에서 상영되고 있다. 서울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14곳인데, 그 중 대기업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8곳뿐이다. 지방의 경우에는 원정관람을 해야 할 정도로 상영관이 부족하다. 그래도 발품을 팔아 상영관을 찾아준 관객들로 인해 <또 하나의 약속>은 상영 6일 만에 20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입소문을 타고 있다.

<또 하나의 약속>은 놀라울 정도로 충실하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재현한다. 그런데도 극영화로서의 재미와 몰입감이 뛰어나다. 또한 균형감 있게 사태의 본질을 짚어내어, 섣부른 증오나 신파에 빠지지 않는 미덕을 보여준다.



◆ 세계초일류 기업과 정부에 맞선 싸움

속초에서 택시 운전을 하는 한상구(박철민)씨는 고등학생인 딸이 초일류 기업인 진성에 취직한 것이 자랑스럽다. 노조가 없을 만큼 노동자 처우가 좋은 기업이라고 하니, 딸이 데모할 걱정도 없다. 딸 윤미(박희정)는 기숙사가 딸린 공장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남동생 대학도 보내주겠다며 진성버스에 오른다. 그러나 2년이 되지 않아 윤미는 백혈병에 걸려 집에 돌아온다. 진성의 관리자는 찾아와 직원들의 성금이라면서 4천 만원을 건네며, 사직서와 산재신청을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받아간 뒤 연락이 끊긴다. 아버지는 병문안 온 딸의 직장 동료들에게 백혈병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를 듣는다. 딸은 죽고, 아버지는 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해 온통 차벽으로 둘러싸인 세상과 싸움을 벌인다.

삼성반도체 산재사건은 2007년 황유미씨의 사망 후 아버지 황상기씨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산재의혹을 제기했다. 건강하던 딸이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지 2년도 되지 않아 백혈병에 걸렸는데, 딸과 2인1조로 작업하던 이숙경씨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 외에 같은 라인에서 근무한 동료와 엔지니어들 중 발병한 사람이 5-6명 더 있다고 들었다면서, 딸이 공장에서 발암물질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황상기씨는 이종란 노무사 등의 도움으로 황유미씨에 대한 산재신청을 했고, 여러 단체가 연대하여 대책위 ‘반올림’이 꾸려졌다.

‘반올림’에서는 피해자들의 제보를 받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제보자들이 나서지 않았지만, 문제가 알려지자 제보가 늘어나 지금까지 151명의 피해자가 접수되었다. 그중 58명은 이미 사망하였다. 유미씨에 대한 산재신청은 거부되었다. ‘반올림’에서는 황유미씨를 비롯한 5명에 대하여 행정소송을 진행하였다. 반도체 공정에 대한 진상조사도 요구하여, 2008년 노동부는 전국 13개 반도체공장을 대상으로 건강실태 일제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노동부는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목록을 ‘영업비밀’이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에도 엄연히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할 필요가 있는 정보’는 공개되어야 한다고 나와 있지만, 정부는 비공개로 버텼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은 역학조사를 벌여 ‘비호지킨 림프종의 발병률은 높고, 백혈병의 발병률은 통계적으로 유의하지 않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통계장난에 불과했다. 비호지킨스 림프종과 백혈병은 본질적으로 같은 질병이며, 젊은 노동자들은 일반 인구군에 비해 건강상태가 좋다는 ‘건강노동자 효과’를 무시한 결과였다. 또한 발병자들이 몰려있는 특정라인으로 범위를 좁혀서 발병률을 비교하지 않고 전체 반도체종사노동자들의 발병률을 비교하여 연관성을 희석시킨 결과였다.

<또 하나의 약속>은 이처럼 상세한 문제까지 짚으며, 세계 초일류 기업과 정부가 힘을 합쳐 병든 노동자들을 상대로 잔혹한 싸움을 벌이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진성은 작업환경측정조사에 전문가의 입회를 막고 아버지와 기자들만 들여보낸다. 아버지는 딸이 근무할 당시와 근무환경이 바뀌었다고 절규하지만, 언론은 ‘청정공장’이라며 찬양성 기사를 내보낸다. 개인적인 질병이니 500만원만 받고 끝내라던 진성은 10억 원을 줄테니 소송을 취하 하라고 회유하는 한편,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에 보조참관인 자격으로 나서 소송을 주도한다. 영화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공방을 통해 반도체산업의 진실을 말해준다.



◆ 반도체 산업의 진실

반도체 산업은 우주복 같은 방진복이나 먼지 하나 없는 ‘클린룸’의 이미지로 인해 깨끗한 첨단 산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방진복과 클린 룸은 각종 설비와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클린룸에서 가장 큰 오염원은 노동자이다. 우주복 같은 방진복은 사람 몸에서 배출되는 미세입자를 막기 위한 것이지, 노동자들의 몸을 각종 유해물질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대로 다 스며요”라는 노동자의 진술은 충격적이다. 클린룸은 공기 압력이 높고, 각종 가스와 납땜으로 인해 냄새가 심하지만, 환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자산업은 노동집약 산업이자 화학물질집약 산업이다.

서울대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작업라인 한 곳에서 무려 99종의 화학물질이 사용된다. 이는 삼성만의 문제도 아니다. 국내 다른 공장은 물론이고,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모두 마찬가지이다.

2003년에 미국 실리콘 벨리에서 IBM사에서 근무하였던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암에 걸려 소송을 한 적이 있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IBM노동자 중 50여명의 암환자를 비롯해 화학물질 중독으로 각종 만성질환에 걸린 피해자가 200여명, 선천성 장애를 아이를 낳은 사례가 50건 이상 드러났다. 그러나 산재는 인정되지 못하였고, 한명씩 개별합의서를 쓰고 개인적 보상을 하며 끝냈다.

이후 공장은 문을 닫고 제3세계로 옮겼다. 대만, 홍콩,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똑같은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연관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011년 황유미씨와 이숙경씨에 대한 산재 인정 판정은 세계에서 최초로 거둔 승리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다. 2013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황유미씨와 비슷한 공정에서 일했던 김경미씨도 승소하여 산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하였고, 싸움은 계속 되고 있다.



◆ 멍게가 되지 말고, 또라이가 되어야 해

<또 하나의 약속>은 대기업을 악마처럼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악마보다 훨씬 촘촘하게 우리를 포획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기본급은 적게 성과급은 많이 주어 경쟁을 유도하는 탓에,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더 많은 물량을 만들기 위해 안전장비를 풀고 작업한다. 진성은 속초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남동생에게 취직시켜주겠다고 접근하여 시위대를 막는 용역으로 활용한다. 동료를 배신하고 거짓증언을 하는 직원은 ‘자발적’인 출세욕으로 그리 하였을 것이다.

선진국에서 기술을 배워와 반도체 산업을 일군 엔지니어(이경영)에게 진성은 곧 그의 정체성이다. 진성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인정받아 온 그는 백혈병에 걸리지만 회사를 원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계 초일류 기업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며, 계속 싸우는 사람은 보상금을 더 받기 위해 떼를 쓰는 것이거나, 빨갱이 물이 들었거나, 또라이라고 수군댄다. “누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데?”라는 말은 대기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믿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말한다.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다” 물론이다. 재판장면에서 보았듯 자본과 국가는 한 몸이 되어 노동자를 상대로 싸운다. 여기에 광고를 팔아야 하는 언론이 가세하여 여론을 만들고, 연구비를 받아야 하는 전문가들이 가세해 지식을 만든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의 체계와 싸우려면, “또라이가 되어야 한다”. 살아 움직이는 동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기 뇌를 소화시켜버린 채 식물처럼 사는 멍게가 되지 말자고. 그리고 자신과 서로의 존재를 믿고 끝까지 싸우자고.

P.S 반올림 카페(cafe.daum.net/samsunglabor)에 들러 지지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또 하나의 약속>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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