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라시’를 통한 현실비판 참으로 신랄하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찌라시>는 속칭 ‘증권가 찌라시’라 불리는 사설 정보지를 소재로 한 범죄 추적극이다. <내 깡패 같은 애인>을 찍었던 김광식 감독의 후속작으로, 독특한 소재와 탄탄한 구성으로 관객을 몰입시킨다. 김강우는 오랜만에 몸에 꼭 맞는 배역을 만난 듯 매력을 발산하며, 조연을 맡은 정진영, 고창석, 박성웅 등도 호연을 펼친다.

‘찌라시’는 고급 정보를 담고 있다는 명목으로, 알음알음으로 연결된 구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받고 발송하는 정보지이다. 누가 어떤 경로로 정보를 모으고, 정보지를 만들어 유통하는지 베일에 싸여 있으며, 정보의 진위도 검증되지 않았다. 하지만 ‘찌라시’는 간혹 언론 못지않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찌라시’의 정보들은 소문으로 떠돌거나, 기자들에게 취재거리를 제공하기도 하며, 증권가나 정치권 등의 의사결정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실질적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흔히 ‘증권가 찌라시’에 나오는 내용의 95%가 가짜라는 말을 하지만, 소문은 기이한 방식으로 현실을 작동시킨다. 이를 이용해 누군가는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누군가는 억울한 피해를 당한다.

여기 ‘찌라시’가 퍼뜨린 헛소문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가 있다. 그는 억울함을 풀기 위해 ‘찌라시’가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경로를 추적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거대한 권력의 위협에 맞닥뜨린다.

◆ ‘찌라시’를 통해 본 정경유착의 고리

연예기획사에 다니는 우곤(김강우)는 여고생 미진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에게 오디션 기회를 주었다가 해고당한다. 우곤은 열정밖에 가진 것이 없지만, 자신을 믿고 찾아온 미진의 매니저가 되어 열심히 미진을 신인배우로 키워낸다. 의리로 맺어진 두 사람은 차츰 실력을 인정받아 이제 성공의 문턱까지 오른다. 그러나 유력정치인이 미진의 스폰서라는 추문이 돌면서 미진은 하루아침에 퇴출 위기에 빠진다. 우곤이 소문을 수습하려 애쓰는 사이, 미진은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우곤은 미진의 복수를 위해 소문의 진원지인 ‘찌라시’를 발송한 자들을 탐문하여 그들의 아지트를 급습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세한 유통 업자들일 뿐이고, 몸통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는데...



<찌라시>는 룸살롱에서 정보회의를 하는 정보맨들의 대화로 시작된다. 그들은 우곤과 미진이 어떻게 만나 힘들게 성공을 향해 나아갔으며, 추락하게 되었는지 주절거린다.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우곤의 좌충우돌이 끝난 뒤, 우곤에 관해 이야기하는 같은 목소리로 이어진다. 즉 액자식 구성인 셈이다. 영화는 ‘찌라시’의 희생자가 ‘찌라시’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지만, 이 이야기 자체가 ‘찌라시’ 정보회의의 대화라는 역설을 품는다. 영화는 ‘찌라시’가 근절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찌라시’ 안으로 함입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제를 ‘찌라시’를 비판하는 것으로 읽어선 안 된다.

영화는 ‘찌라시’가 제작되고 유통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찌라시’가 악의적인 소문을 양산하고, 그로인해 희생자가 생길 수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지만, 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영화는 ‘찌라시’도 하나의 구조적 산물이며, 이를 작동시키는 권력관계를 보아야 함을 역설한다. 즉 영화에서 ‘찌라시’는 소재일 뿐이고, 주제는 ‘찌라시’를 통해 본 정경유착의 고리이다.

영화가 밝히는 정경유착은 참으로 신랄하다. 신도시 개발을 쥐고 있는 대기업이 대선 때 도움을 주고, 당선 후 청와대 정책실을 통해 정권과 커낵션을 유지한다. 대기업회장이 검찰총장의 임명 등 정부인사에 개입하는가 하면, 신도시 개발에 반대하는 야당의원이 국회 상임위원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보좌관을 매수해 악소문을 퍼뜨린다. 대기업홍보실은 광고수주를 빌미로 언론을 길들이고, 대기업의 비리를 폭로한 기자에겐 린치를 가한다.

우곤이 청와대 정책실 비서관을 만나고자 했을 때 나타난 차성주(박성웅)는 대기업의 더러운 일을 담당하는 해결사였다. 차성주의 존재는 대기업과 청와대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고리이다. 그는 고비 때마다 나타나 우곤의 손가락을 부러뜨린다. 하지만 돈과 권력과 정보력으로 틀어막으려던 진실은 끝내 ‘손가락들’로 인해 폭로된다. 우곤은 ‘찌라시’의 폐쇄성을 역이용하여, 개방성에 무릎 꿇게 한다. 그들이 폐쇄적인 고급 정보에 매달리는 동안, 진실은 오픈된 정보의 바다에 흘러넘친다.



◆ 불의한 세계의 마지막 윤리 ‘오빠지심’

감독의 전작 <내 깡패 같은 애인>은 늙다리 깡패가 옆방에 이사 온 취업 준비생 여성과 티격태격 정을 쌓다가, 그녀를 위해 헌신하는 이야기이다. <내 깡패 같은 애인>은 로맨틱코미디의 장르를 활용하여 청년실업의 세태를 고발하는 영화였다. 영화는 지방대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현실의 사회경제적 위치에서 늙다리 깡패와 동일선상에 놓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면서, 취업시장의 어이없는 횡포와 젊은이들이 꿈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태에서 그것에 구멍을 내는 유일한 힘은 ‘오빠의 희생’이었다. 이는 이성애적 감정과는 차이가 있으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녀가 겪는 부당한 고통을 안쓰럽게 여기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그녀의 꿈을 응원하면서, 피차에 가진 것 없는 사람들끼리 돕고자 하는 의리의 연대감 같은 것이었다.

<찌라시> 역시 의리로 맺어진 매니저가 억울하게 죽은 여배우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이다. 두 작품 모두 ‘오빠지심’이 영화를 끌어가는 핵심동력이다. 사실 두 영화 모두에서 이들이 가족도 아닌 여성을 위해 그렇게까지 희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후반부 어느 지점에서는 무리함까지 느껴진다.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동철은 면접장에 나타나 자신은 비록 쓰레기지만,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꼭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미친 진상을 부린다. <찌라시>에서 우곤은 연예기획사를 운영하게 해주겠다는 대기업의 제안까지 뿌리치며 미진의 진실을 알리고자 한다. 과연 현실에서 그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할 ‘오빠’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감독은 ‘오빠지심’이 남성권력자들에 의해 망쳐진 세계에서 가진 건 X밖에 없는 남성주체들이 품어야 할 최소한의 윤리이며, 불의함으로 무너져 내리는 세계를 지탱하줄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는 듯하다. <홍도야 우지 마라>의 오빠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친동생의 억울함도 풀어주지 못하는 무력한 주체였고, ‘오빠 못 믿니?’의 오빠는 이성애적 음흉함을 드러내는 역설이었지만, 김광식 감독의 ‘오빠지심’은 실로 박애적이다. <전태일 평전> 이후, 이토록 뭉클한 ‘오빠지심’이 있었는지 헤아려볼 정도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찌라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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