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제국의 부활’, 에바 그린 육체미로 거둔 절반의 성공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300 : 제국의 부활>은 <300>의 속편으로, 전편과 동일한 시대에 벌어진 또 다른 전투를 담는다. 전편이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졌던 테르모필레 계곡의 육지전을 다루었다면, 속편은 그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졌던 살라미스 해전을 다룬다. 전편을 통해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팬티만 입은 빨래판 복근의 향연과 댕강댕강 목이 달아나던 기이한 살육의 흥분이 그동안 수많은 패러디로 인하여 이제는 더 이상 새롭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전 세계 팬 층이 확보되어 있는 이상, 속편이 나오는 것은 시장경제의 원리상 당연한 일일 터.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은 비주얼을 어떻게 여전히 자극적인 것으로 느끼게 하는 가가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300 : 제국의 부활>은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 호쾌한 해전의 스펙터클과 에바 그린의 육체미

영화는 전편에서 전멸한 300명의 병사가 시체로 누워있는 계곡을 비추며 시작된다. 신탁에 의해 스파르타를 비롯한 그리스 전체가 무너지고, 아테네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진다. 레오니다스 왕(제라드 버틀러)이 3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전사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 불길한 신탁 때문이었다. 신탁에 의해 그리스 연합군의 출정이 거부되자,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를 원하는 레오니다스 왕의 결사대가 출정하여 백만 대군과 맞서 싸우다 모조리 전사하였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전함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왔을 때, 테미스토클레스(설리판 스태플린)가 쏜 화살이 다리우스 왕의 가슴을 적중시킨다. 다리우스 왕은 “오직 신만이 그리스를 굴복시킬 수 있다”는 유언으로 공격하지 말 것을 당부하지만, 페르시아의 여전사 아르테미시아(에바그린)는 왕자 크세르크세스에게 “당신이 신이 되어 공격하면 된다”고 부추긴다.

망설이던 왕자였던 크세르크세스는 신왕으로 거듭나, 마침내 수 백 대의 전함을 이끌고 아테네로 쳐들어온다. 아르테미시아는 본래 그리스 태생으로 어린 시절 비참한 노예생활을 겪었지만, 페르시아 왕에 의해 전사로 거듭나면서 그리스에 대한 복수를 꿈꾸어 왔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스파르타의 고르고 여왕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페르시아의 해군을 맞선 중과부적의 전투를 벌인다.



영화는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전으로 기록된 살라미스 해전을 스펙터클한 화면으로 보여준다. 과연 배가 불타고 병사들의 사지가 떨어져나가는 장면은 강렬한 시각적 흥분을 선사한다. 주인공인 테미스토클레스 캐릭터가 다소 밋밋하고, 설리판 스태플린의 매력이 전편의 제라드 버틀러가 보여주었던 남성미에 미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에바 그린의 뇌쇄적인 아름다움이 모든 아쉬움을 상쇄해준다. 전쟁의 긴장이 팽팽한 가운데 뜬금없이 배치된 정사장면은 격투장면을 방불케 하고, 에바 그린의 가슴 노출은 오래도록 잔상을 남기는 기이한 흥분을 도출시킨다.

◆ 고대사를 알리바이로 삼은 살육의 쾌감

<300 : 제국의 부활>은 고대사를 소재로 삼지만, <트로이>나 <폼페이 : 최후의 날> 같은 대서사극 장르로 보긴 힘들다. <300> 시리즈는 대서사극과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활용한다. 물론 <트로이> 등의 영화도 역사적인 사건을 웅장한 스펙터클로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를 서사의 측면에서 활용하며,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해석 하는가 등의 문제가 논의될 여지를 갖는다.



하지만 <300>시리즈에서 역사는 서사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그들의 복식이나 전투 아이템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을 결정하는 그래픽 디자인 시안으로 존재한다. 또한 무자비한 살육의 시각화로 쾌감을 느끼면서도 죄의식이 사라지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이는 마치 바로크 시대의 회화들이 관능적인 육체를 그리면서도 소재는 죄다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따왔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300>시리즈에서 역사는 서사가 아닌 디자인 설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영화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재현하고 해석하는 하는 문제는 완전히 부차화 된다. 영화가 이 전쟁이 ‘아테네인들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성전’이라고 의미부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갑론을박하는 것은 우습다. 영화가 이 전쟁에 어떤 아전인수 격의 의미를 부여하든 그것은 역사적 해석의 가치를 담은 말들이 아니라, 현대 관객들에게 누가 우리 편인지를 알려주는 유니폼 같은 장치이기 때문이다.

아테네 군대는 자유민 전사들로 그려져 있고, 페르시아 군대는 사슬에 묶인 노예로 그려져 있다거나, 문명인 대 야만인의 구도로 오리엔탈리즘을 시전한다는 식의 지적도 허탈하긴 마찬가지이다. 이는 애초에 <300>시리즈에서 역사는 팬티나 갑바 혹은 창이나 피 등의 게임 아이템을 설정해주는 용도로 존재할 뿐, 가치와 의미를 담지 않기 때문이다.



◆ 3D 큰 화면으로 즐기는 게임?

영화는 고대 전쟁을 무대로 삼아, 웬만한 전쟁영화나 액션영화에서도 몇 장면으로 그칠 살육의 향연을 카메라의 앵글과 속도를 리드미컬하게 조절하면서 현란하게 담는다. 관객들은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 앉아 있던 관객과 같은 기대와 흥분을 품으며 화면을 응시한다. 로마시대의 검투사를 보던 관객들이나 혹은 현대의 이종격투기를 관람하는 관객들이라 할지라도, 살육의 장면을 이렇게 여러 각도로 속속들이 훑고 느리게 돌려가며 탐미하기는 힘들다. <300>시리즈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화, 아니 영상물이다.

<300> 시리즈는 영화라기보다는 역사를 차용한 만화 혹은 게임을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보는 새로운 방식의 영상물이다. 이 영상물의 특징은 강렬한 비주얼로 감각적 자극은 극대화하되, 기존의 영화와는 달리 정서적 교감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캐릭터와 관객사이에 거리두기가 일어나서, 그들의 상황이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일지 않는다. 목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철철 흘러도 저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기 때문에, 그 충격적인 비주얼을 찬찬히 음미하며 즐길 수 있다. 이는 다른 영화들을 보면서는 불가능했던 것인데, <300>시리즈는 살육을 아주 가까이서 자세히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게임을 즐기듯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3D 큰 화면으로 즐기는 만화이자 게임이자 영화이자 그 어느 것도 아닌 일체형의 세계, 우리는 조만간 이런 것을 부를 다른 이름을 찾게 될지도 모르겠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300 : 제국의 부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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