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이 곳은 1612년 음력 4월 일본의 어느 외딴 섬 후나시마. 붉은 태양과 그 빛을 받은 바다가 눈부시게 반짝이면 일본 최고 검객 2인이 등장해 승부를 펼친다.

60여 차례의 시합에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약속된 시간보다 늦었다. 반나절을 더 기다린 천재 검객 사사키 코지로의 초조함과 부담감은 이미 최고조에 이른 상태. 무사시는 긴 목검으로 코지로를 쉽게 제압한다. 이렇게 승부는 단숨에 결정이 나 버리고, 세기에 남을 이 결투는 훗날 코지로의 검법을 칭하는 “간류”라는 명칭을 따서 “간류 섬의 결투”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비로소 연극 <무사시>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코지로는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작가 이노우에 하사시는 코지로가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고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노우에의 손을 거친 이 작품은 니나가와 연출가 특유의 아름답고 서정적인 무대 미학과 만나 3분 안에 객석을 사로잡게 된다. 무사들의 긴장감 넘치는 결투로 객석을 긴장시키더니, 곧 6년의 시간이 흐른 뒤 어둑한 대나무 숲과 조용한 사찰로 관객을 초대했다. 무대 장치 역시 조용히 자신의 몫을 하고 있다는 듯 ‘스르르’ 떨림을 안기며 등장했다. 주목할 점은 여기까지 이야기가 3분 안에 다 이뤄진다는 점.

<무사시>는 3일간의 이야기를 3시간 안에 리드미컬하게 담아내고, 3분 안에 관객을 제 편으로 만든 연극이었다. 이미 2010년 런던의 바비칸 센터와 뉴욕의 링컨 센터, 2013년 싱가포르의 에스플라네이드 등에서 세계의 관객들과 만난 <무사시>는 복수의 칼을 간 고지로가 무사시를 찾아가 최후의 승부를 벌이는 3일간의 이야기를 그렸다.

눈이 황홀한 연극, 막이 오른 후 3분 안에 관객들을 사로잡는 연출가 니나가와 유키오의 연극 <무사시>가 3월 23일 LG아트센터에서 막을 내렸다. 국내에선 2011년에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이는 니나가와의 작품이다. 3분 안에 관객들을 일상으로부터 연극 속으로 몰입시키기 위해선 눈으로 보면서 황홀감이 들 수 있는 '눈의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또한 시각적인 무대미술과 청각적인 음악, 소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연극의 템포나 속도감을 강렬하게 조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출가라는 것은 아마 가장 먼저 감동해서 뛰기 시작하는 러너(runner)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한 연출가답게 2011년 타계한 일본의 국민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의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를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공연 개막에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니나가와는 “‘무사시’는 ‘쓸데없는 살인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에 대한 하사시의 유언과도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작품”임을 전했다. 극 중에선 검객 두 사람의 결투가 성사 되지 않도록 일반 민중이 여러 가지 방법을 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연출은 이 부분을 ‘민중의 힘’으로 봤다. 결투는 의미 없고, 폭력과 복수의 사슬을 빨리 잘라내야 함을 유희적으로 풀어내 관객은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된다.

가장 일본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연극이 탄생했다. ‘마음 속에 삼독 즉,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 없는 자만이 검을 잡을 자격이 있음’을 설파하는 장면, 해학과 익살이 돋보이는 교겐 춤인 ‘문어’, 관객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일본의 전통 예능 노(能)를 떠올리게 하는 선종의 사찰 장면, 5인 6각으로 움직이는 수련법과, 외면적으론 검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비장하게 기술을 배우는 것이지만 결과적으론 풍자적 댄스가 된 장면 역시 신선한 여운과 즐거운 웃음을 남겼다.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남는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승부욕을 불태우는 주인공은 유명 스타 배우인 후지와라 타츠야(무사시)와 미조바타 준페이(코지로)이다. 영화 <데스 노트>, <배틀 로얄>, 연극 <햄릿>, <신도쿠마루>, 드라마 <사랑따윈 필요 없어, 여름> 등으로 일본의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한 후지와라 타츠야는 2009년 초연 이후 세 차례(2010, 13, 14년)에 걸쳐 재 공연될 때마다 계속 주인공 무사시 역할을 맡아 내공을 닦아오고 있다.



스타 캐스팅에 대해 니나가와는 “안 좋은 스타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노력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대중 민중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나쁘지만은 않다”는 의견을 밝혔다. 15세에 발탁에 자신의 페르소나로 키우고 있는 배우 타츠야에 대해 니나가와는 “영혼 속에 뭉쳐져 있는 게 다른 배우들과 다른 타츠야는 (연극을 사랑하는)연극 병에 걸렸으며, 준페이는 연극 전염병에 걸린 배우이다. 젊은 배우들과 중견 배우들이 서로 도와주면서 이번 작품을 만들어냈음”을 전했다.

<무사시>는 두 검객 주변을 스즈키 안, 가무사카 나오마사, 요시다 코타로, 시라이시 카요코 등 배우진들이 유머러스한 움직임과 이야기로 채워낸다. 니나가와는 “시라이시 가요코 배우는 아시아인이 할 수 있는 신체 움직임이 살아있는 아시아적 연기로 극찬을 받았다”며 눈 여겨 볼 것을 당부했다.

5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송두리째 연극에 바쳐온 니나가와는 지난 2010년 10월 건축가 안도 타다오,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 등이 수상했던 일본 문화훈장을 수상, 예술가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며 그야말로 일본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니나가와는 “전쟁을 거친 세대로서 세상엔 용납 못할 일이 많다는 걸 자주 느끼는데, 연극을 통해 여러 나라 민족이 서로를 이해하고, 문화를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관객과 통할 수 있는 가치적인 부분에 대해, “극장 입구에 서 있지 말고 연극 세계 안으로 들어왔으면 한다. 연극을 거부하지 말고 좋다면 박수를 보내고, 재미없다면 또 다른 반응을 보내주었음 한다”고 전했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LG아트센터]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