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독교인 관점에서 본 ‘노아’ 성서 왜곡 논란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 <노아>에 대한 이야기는 둘로 나뉜다. 첫째, 이것은 과연 아이맥스로 봐야 할 만큼 돈 값 하는 스펙터클한 블록버스터인가. (내 답은 '아니다'다.) 둘째, 이 작품은 성서를 왜곡하며 순진무구한 기독교 신자들을 농락하고 푼돈을 뜯어내는 상업영화인가.

전자는 건너 뛰고 두 번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아로노프스키는 성서의 소스를 비교적 유연하게 활용한다.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섞고 (많이들 착각하는 두발가인은 비교적 적절하게 선정된 성서 속 인물이다. 주어진 역할은 많이 다르지만.)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 일부를 전세계라고 생각했던 성서 작가들의 상상력을 넘어 전지구로 캔버스를 넓힌다. 물론 그 와중에 노아의 캐릭터는 자연스럽게 아로노프스키화 된다. 그러면서도 방주 설계에는 성서의 디테일을 꼼꼼하게 따르려는 시도가 보인다.

이것이 나쁜 걸까? 이야기꾼의 논리만 따진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야기꾼에게 소재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재료일 뿐이다. 완성된 이야기가 전달하려는 주제를 온전하게 담고 완성도가 높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소재가 실제 역사의 일부이고 그것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면 반론이 따를 수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주인공 클레오파트라는 불멸의 문학 캐릭터지만 로마 측 기록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고 로맨틱한 연인의 측면에 지나치게 치중한 결과 한 나라의 군주이고 정치가였던 한 인물을 왜곡하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셰익스피어야 별다른 악의가 없었겠지만 이러한 왜곡이 정치적 의도를 담고 있는 프로파겐다라면 당연히 문제가 있을 것이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어떨까. 우선 성서가 기록한 노아라는 인물과 그가 만든 방주, 전세계를 덮은 대규모의 홍수는 존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야기 자체가 완전한 허구라는 말은 아니고, 성서에 기록된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일어났던 대규모의 홍수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성서 작가들은 당시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여러 기록들을 읽거나 그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성서 이전에도 홍수와 홍수 생존자의 이야기를 담은 문학작품과 기록은 굉장히 많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유명한 <길가메쉬 서사시>이다. 이들은 모두 다른 이름의 생존자들이 비슷한 재난에서 살아남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성서는 노아 이야기의 '원작'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수많은 각색물 중 하나이다. 이건 인터넷만 조금 뒤져도 알 수 있는 상식 중의 상식으로 이것만 가지고는 유식한 척도 할 수 없다.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고 해도 노아의 이야기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노아의 방주가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있었다. 물론 노아가 했던 식으로 구조한 생물들이 전세계 동식물의 조상일 가능성은 제로이다. 성서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는 '젊은 지구' 광신자들은 지금까지 전세계를 덮는 홍수가 일어났다는 어떤 의미있는 증거도 내지 못했다. 자기만의 웹사이트에 모여 어줍잖은 냉소만 떨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성서에 기록된 노아의 이야기는 일어난 적 없는 사건에 말려든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성서가 왜 그의 이야기를 기록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별 계획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이 내 짐작이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다. 중요한 건 노아의 이야기가 이야기꾼의 평범한 소스 이상의 어떤 것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아로노프스키는 얼마든지 자기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종교를 믿는 수많은 경전 작가들이 자기만의 노아 이야기를 썼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성서가 기록한 것보다 훨씬 이치가 맞는 인간 드라마이다.



과거의 종교는 현대의 신화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한 술 더 떠서 과거의 종교가 현대의 오락이라고 한다. 하긴 얼마 전까지만해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숭배의 대상이었던 토르 신이 지금은 마블 액션 히어로가 되어 아이언맨, 헐크와 함께 외계인들과 한판 붙는 시대이니 그럴 법도 하다.

현대의 종교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다. 여기서 나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예를 들 수도 있지만 일단 기독교와 영화로 제한하기로 하겠다. 원래 순진무구한 기독교 신자들은 지난 몇 십 년 동안 할리우드의 밥이었다. 5,60년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성서 소재 영화들은 오로지 수익이 최대 목표였던 유태인 제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인본주의자 작가인 고어 비달은 그 중 최대 히트작인 <벤 허>의 각본을 쓰면서 벤 허와 메살라를 동성애 연인 관계로 설정하고 낄낄거렸지만 기독교인 관객들은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70년대 오컬트 유행에 편승해 한 몫 챙기려고 작정한 호러 영화 <오멘>은 기독교인 관객들을 모으려고 일요일을 개봉일로 잡았고 그들은 정말 벌떼처럼 극장에 몰려들었다. 성서영화는 더 이상 유행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들은 여전히 쉽게 조종 가능한 타겟이며 이는 최근작 <선 오브 갓>의 흥행성공이 입증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에서 어떤 종교적 진지함을 탐구하는 건 각자의 자유지만 나로서는 너무 심각하게 굴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지난 1세기 동안 만들어진 성서와 종교 소재의 진지한 걸작들이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동성애자, 바티칸에서 금서 리스트에 오른 불순한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앞의 셋에 해당되는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은 지금까지 나온 작품들 중 가장 훌륭한 예수영화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여전히 카잔차키스/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구더기가 끓는 썩은 시체처럼 피하겠지만 그 작품만큼 강렬한 영적 고통을 품고 있는 영화도 많지 않다.

아로노스프키의 <노아>도 거기에 해당되냐고? 그건 아닌 것 같다. 그의 <노아>는 신앙에 바탕을 둔 영화가 아니라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노아가 믿고 있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고통을 겪고 어떤 일까지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가 한계인가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노아는 생생한 인물이고 그만큼이나 극단적인 인물들이 들끓는 지금 시대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런 노아가 성서가 그린 인물과 다르다고? 그렇긴 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여러분은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이 아담 웨스트의 배트맨과 다른 게 불만인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노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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