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 이토록 함축적이고 농밀할 수가!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드라마 찬(贊)△. JTBC 월화드라마 <밀회>는 흔히 ‘마흔 살 유부녀와 스무 살 남자의 격정 멜로’라는 타이틀로 소개된다. 그 결과 남녀의 구도가 바뀐 흔한 불륜드라마가 아닌가하는 오해를 받기 쉽다. 하지만 <밀회>는 그저 그런 불륜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다. <밀회>는 고급예술을 둘러싼 상류사회의 추악함을 신랄한 솜씨로 도해한 사회극이자, 사랑이라는 농밀한 감정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해 낸 수작이다.

선재(유아인)은 피아노에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가난한 청년으로 오혜원(김희애)부부에 의해 발탁된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아트센터 실장으로 일하는 오혜원은 음대교수인 남편(박혁권)이 데려온 선재의 연주를 들으며, 음악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선재는 음대입학의 기회를 얻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진다. 오혜원은 선재를 찾아 내 음악을 다시 할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선재는 오혜원에게 깊은 사랑을 느낀다.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해오는 선재에게 오혜원도 비밀스러운 욕망을 품는다.

◆ 클래식한 상류사회, 그 추악한 이면

고급예술에 재능을 지닌 가난한 청소년이 우연한 계기로 발탁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는 상당한 재미를 지닌다. 가령 <호로비치를 위하여>에서 가난한 고아소년이 동네 피아노학원 원장의 도움으로 음악가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나, <빌리 엘리어트>에서 탄광촌의 소년이 발리리노의 꿈을 이루게 되는 과정은 상당한 감동을 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에서 가난한 소년이 도달하게 되는 예술세계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세계로 그려진다. 그들이 동경하는 음악과 발레의 세계는 궁핍한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이지, 그 자체는 아무런 분열이 없다. 오직 재능과 예술혼만이 살아 숨 쉬는 천상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곳에서 일체의 잡스러움에 물들지 않은 천상의 두레박이 내려와 천재소년을 데려 간다. 하지만 우리도 이미 알지 않는가. 고급예술의 세계도 허다한 비리와 암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니 고급예술의 장이야 말로, 자본주의적 욕망이 들끓는 가장 값비싼 이전투구의 장임을.

<밀회>는 가난한 천재 소년을 발탁하는 상류사회의 모순과 분열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선재에게 음대 입학의 기회가 제공되는 것은 음대 입시가 실력만으로 뽑힐 수 있는 매우 공정한 경쟁의 장이어서가 아니라, 뇌물과 레슨과 악기구입 등을 둘러싼 온갖 비리가 우글거리고 파벌과 지분을 둘러싼 암투가 팽팽한 가운데, 자신들의 비리를 덮기 위한 입막음용으로 선재라는 명분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혜원은 재벌 딸인 친구 영우(김혜은)의 시녀노릇을 해가며 영우 집안의 돈으로 유학을 갔다 왔다. 그는 영우 집안이 소유한 아트센터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으며, 그의 집과 차는 물론이고 남편의 교수자리까지 모두 영우 집안에서 해준 것이다. 오혜원은 아트센터 대표인 영우와 영우의 계모이자 재단이사장인 성숙(심혜진)과 영우의 아버지인 회장님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무게중심에서 삼중첩자 노릇을 하면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룹 법무팀장인 남편을 두고도 젊은 모델에게 수표를 안겨주며 시시덕거리는 영우의 사생활을 관리하고, 성숙의 빵빵한 딴 주머니와 미술품을 통한 재태크를 관리해주며, 회장님의 오입질을 적당히 묵인하다 뒤치다꺼리를 해준다. 겉으론 고상해 보이는 상류사회이지만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돈이나 섹스이고, 여차하면 욕설이나 폭력도 난무한다.

오혜원 역시 겉에서 보면 지극히 고상하고 아랫사람에게 친절함을 보이는 우아한 상류사회의 일원이지만, 매일 신경을 곤두세워 온갖 추잡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고급 하녀이다. 물론 그 자리는 오혜원의 야심과 지독한 노력으로 얻은 결과이다. 하지만 선재의 등장으로 오혜원은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선재의 연주를 처음 들었을 때, 오혜원은 눈물을 흘린다. 빛나는 음감을 지닌 오혜원이 오랫동안 동경해왔으나 이제는 잊고 산지 오래가 된 ‘예술’이라는 아름다움에 저도 모르게 도취된 것이다.

드라마는 상류사회라고해서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누리고 사는 것도 아니요, 예술을 빙자한 추악한 돈거래만 난무한다는 사실을 생생한 질감으로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오혜원의 내면적 결핍이 신랄하게 드러난다. 오직 재벌가의 충직한 개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자신이 조선족 식당 아주머니보다 못한 자존감을 지녔다는 사실에 모멸감을 느낀다. 모든 인민은 평등하며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사회주의식 교육을 받았다는 조선족 아주머니의 일갈은 오혜원은 물론 자본의 가치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에게 아찔한 충격을 안긴다. 상류사회의 오혜원과 가난한 선재의 만남에서 선재가 두레박을 타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혜원이 가까스로 머리에 이고 살던 유리천정이 와장창 무너져 내린다. 드라마는 오혜원의 결핍을 통하여, 두 사람 사이에 싹트는 사랑이라는 낯설고 위험한 감정을 과감하게 설득해낸다.



◆ 인물과 감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

<밀회>는 인물과 상황과 감정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오혜원은 역대 어느 영화나 드라마의 여주인공들에 비해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다. 그는 정갈한 얼굴로 비열한 일들을 처리하며 출세의 야심을 다지는 전문직 여성이자, 집에서조차 긴장을 늦추지 않고 용렬한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냉철한 여성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진심을 터놓지 않으며, 자신의 상황을 과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욕망과 자괴감이 들끓는다. 그는 선재를 향한 욕망을 한껏 자제하면서도, 고백하는 선재에게 먼저 키스하며 “까불지 마. 무섭게 혼내 준거야. 주제넘게 굴지 마”라는 말로 관계의 우위를 확인하고,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마. 나만 할 수 있어”라며 단속을 한다. 오혜원은 <로맨스가 필요해3>의 신주연(김소연)처럼 맹하고 미숙한 인격의 커리어우먼이 아니며, <정사>의 서현(이미숙)처럼 질식할 듯 정체되어 있는 유부녀가 아니다. 그는 가장 결이 복잡한 인격과 끓어오르는 오욕칠정을 지닌 주체이다.



드라마에서 인물들 각자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어휘와 말투를 사용하는 것도 흥미롭다. 선재는 첫 키스 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오혜원에게 “선생님은...제가 ‘극혐’에 빠졌을 때...그거 정말 셌어요. 남자는 그럴 때 키스해요. 남편 있는 여자들은 다 그렇게 ‘쌩까나요?’ 어른사람처럼 보이려 애쓰지 마요...”등의 말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이것은 정말로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한 스무 살짜리 청년의 고백처럼 들린다. 오혜원의 남편에 대한 묘사도 탁월하다. 그는 인격도 실력도 정치력도 없으면서 오직 질투와 허세만 지닌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근사한 말로 자신의 행위나 욕망을 포장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내용이 없는 탓에 그의 말은 공허하게 흩어진다. 드라마는 아주 짧은 순간, 가령 여자를 밝히는 회장이 아랫사람에게 지분거리고 지나가자 아랫사람들끼리 킥킥거리는 단 1분의 시간동안에도 굉장히 밀도 높은 사실감을 전달한다.

<밀회>에서 가장 뛰어난 감정묘사는 음악을 통해 드러난다. 드라마는 클래식 음악을 단지 소재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선곡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직접 표현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선재와 오혜원이 나란히 앉아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판타지아’를 칠 때, 두 사람은 서로를 희롱하고 교감하며 격정과 환희를 넘나든다.

그들이 마침내 연주를 마치고 숨을 헐떡일 때, 그것은 이미 오르가슴에 도달한 섹스이상의 감흥을 표현한다. 선재가 “한 번 더 해요”라고 말하고, 오혜원이 “오늘은 여기까지” 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누가 들어도 섹스이상의 관능성을 지닌다. 그들이 간신히 숨을 고르며 희열에 가득 찬 서로를 끌어안아 쿵쾅거리는 심장을 마주 댈 때, 옆방에서 잠을 자던 남편은 잠시 깨어 피아노소리를 듣더니 다시 흐뭇하게 잠이 든다. 음대교수라는 그는 정녕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이다! 이토록 함축적일 수가! 이토록 농밀할 수가!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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