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샘물교회 신자들을 위한 어설픈 변명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이장호 감독이 영화 <시선>으로 돌아왔다. <천재선언> 이후 갑작스럽게 단절된 경력을 19년 만에 다시 이은 것이다. 이건 당연히 반가운 뉴스여야 한다. 이 영화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 때문에 더욱 유감스럽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선>은 형편없는 영화이다. 이런 부류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영화인 전설의 <멘데이트>처럼 기술적 완성도부터 망가지는 영화는 아니다. 그 부분만 보면 <시선>은 그럭저럭 정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장호의 신작에서 기대했던 건 그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의 감독이다. 당연히 기대는 더 높아야 한다.

영화의 내용을 보자. <시선>은 두 개의 소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를 갔다가 탈레반에게 피납되었던 분당샘물교회 신자들의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이다. 원래 이장호는 <침묵>을 우리나라 배경으로 각색하려 했다가 예산 때문에 포기하고 나중에 샘물교회 이야기에 <침묵>의 테마를 얹었다. 당연히 저작권 문제가 언급되어야 마땅한 순간인데,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걸 보면 그 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보다. (여담이지만 <침묵>의 영화판은 마틴 스콜세지가 반평생 동안 계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로, 그의 차기작이 될 예정이다.)

샘물교회 이야기야 끔찍하기 짝이 없는 난센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이야기가 영화화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로지 사건 자체가 부조리하기 때문에 더욱 언급될 가치가 있다. 단지 그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1) 샘물교회 신자들을 포함한 한국 개신교들의 마인드를 제대로 이해하면서, (2) 이 사건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통찰력의 소유자여야 할 것이다. 신자로서 이장호는 (1)에 해당된다. 하지만 (2)의 능력은 갖고 있지 않다.



샘물교회 사건에 대해 이장호가 갖고 있는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들이 동남아에 있는 가상의 이슬람 국가에 선교 갔다가 이슬람 반군에게 납치되었다는 뉴스가 한국에 전해지자 수많은 목사와 신자들이 납치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는 장면이 있다. 이들의 수많은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차자 밑에는 자막이 뜨는데, 그들은 모두 당시 인터넷에 떴던 '개독 욕설'이다. 이 장면을 보면 두 가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1) 이장호는 오로지 샘물교회 신자들의 관점만을 대변한다. (2) 그리고 그를 대변하는 이 영화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리뷰도 '개독 욕설'로 받아들일 것이다. 탈출구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영화가 영화 속 개신교 신자들을 일률적인 선인들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는 입장도 있을 것이다. 하긴 그들 대부분은 문제가 심각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바람을 피우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아내를 구타하고 어떤 사람은 사기꾼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가 이들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이들의 인간적 결함은 모두 신앙을 통한 구원이라는 익숙한 스토리를 위한 밑밥에 불과하다. 그 증거로 그는 영화 속 폭력 남편의 문제점에 대해 어떤 깊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기도와 신앙으로 해결될 하찮은 문제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이 왜 정부가 가지 말라고 했던 위험 지역에 가서 그 꼴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띠끌만큼의 해명도 없다. 가상국가에서 벌어진 허구의 사건이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실제로 이장호는 그에 대해 고민이 전혀 없다. 기자간담회에서 그가 했던 말은 사람들이 샘물교회 신자들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가 내밀 수 있는 근거는 샘물교회 신자들이 쓴 수기가 전부이다.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슬람 국가도 이슬람 교도들도 문제가 심각하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장호도 특정 종교를 비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장호가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이슬람교에 대한 비판인가, 아니면 기독교인들이 품고 있는 이슬람포비아의 기계적 노출인가. 이 영화에서는 전적으로 후자이다.

무언가가 비판이 되려면 그것은 사실에 바탕이 두고 있어야 한다. 샤리아 법이 여성과 아동인권을 위협하고 있다면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고 비판하면 된다. 하지만 이장호는 실제 이슬람교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다. 심지어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이 없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일을 모델로 삼아 인도네시아에서 영화를 찍으려 했다가 포기하고 캄보디아로 가서 찍은 것부터가 그 증거이다. 탈레반과 가상의 동남아 국가 반군이 이슬람교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허구를 드러낸다. 동남아의 어떤 국가도 아프가니스탄처럼 종교적으로 일원화되어 있지 않고 당연히 타종교와의 관계도 훨씬 복잡하다. 이게 그렇게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인가.

<시선>에서 이슬람교는 오로지 미신적인 공포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그들이 악인 진짜 이유는 기독교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는 야만인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적이라는 것이 가장 큰 죄이고 다른 이유는 부수적이다. 이장호는 샘물교회 이야기에 <침묵>을 끼워넣으려면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를 시대배경으로 삼고 <침묵>의 이야기를 끼워넣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샘물교회와 <침묵>의 생각없는 결합은 우스꽝스럽다. 영화 속에서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순진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영역권을 두고 다투는 두 폭력배 조직처럼 보인다. 물론 이장호는 그의 영화가 그렇게 보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의 영화가 자기네들을 '명예백인' 쯤으로 여기며 '동남아'를 설치고 다니는 한국인들의 추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 성공한 예술가들은 부정적인 비판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다. 온갖 비판에 다 귀를 기울이며 거기에 휩쓸리다보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질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는 건 그런 와중에서도 최소한의 자기 성찰의 능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19년 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몰라도 이장호는 그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니, 더 심해졌다. 그는 지금 과거에 만들었던 모든 영화들을 부정하고 (그 중 몇 편은 한국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다) 막 그가 완성했고 앞으로 만들 영화들만을 옹호한다. 신앙심 깊은 늙은 이장호가 '돈과 명예를 위해 영화를 만든' 젊은 이장호를 욕하고 비난하는 광경은 우스꽝스럽고 무섭다. 한국의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편협하고 잔인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랄까. 그 젊은이가 자기 자신이어도 마찬가지다.

이런 그가 달라질 가능성은 없다. 그는 지금 자신에 대한 비판을 차단할 이중의 장벽 안에 갇혀 있다. 그의 신앙과 교회는 영화의 주제에 대한 모든 비판을 튕겨낼 것이다. '영화계의 대선배'라는 위치는 그의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의 통로를 차단할 것이다.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봉준호를 포함한 그의 후배들이 자신의 새 영화를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를 자랑했다. 그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후배들이 선배에게(그것도 <바보선언>을 만든 옛 거장에게) "선배님 신작은 형편없어요"란 말을 참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시선> 스틸컷, 메이킹필름, 크로스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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