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중략)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일본 소설 <배를 엮다>에 나오는 말이다. 이 소설은 <행복한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제목이 번역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개념에 맞게 소설에서 새로 편찬하는 사전 이름이 ‘대도해(大渡海)’다. 제 아무리 많은 말로 이뤄진 바다 같은 책도 이 사전이면 헤쳐갈 수 있다는 뜻이겠다.

이 책을 추천하지는 않는다. 접근은 신선한데, 구성과 전개가 느슨하다.

대도해는 자국어 사전이다. 만약 외국어를 습득하거나 번역하기로 목표를 잡았는데 그 외국어 사전이 없다면?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라는 일본인은 그 심경을 이렇게 들려줬다.

“실로 방향타 없는 배로 망망대해를 항해했다. 정박할 항구는 없었다. 단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배를 엮다>의 개념은 스기타의 이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스기타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는 채 네덜란드 해부학 책 <타펠 아나토미아> 번역에 도전한다. 스기타와 두 사람이 작업을 시작했지만, 네덜란드어 지식이 가장 많은 사람도 단어와 문장을 조금 익힌 정도였다.

세 사람은 인체의 앞면과 뒷면을 그려놓고 각 부위를 표시한 부분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하루 종일 한 구절에 막혀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는 이렇게 예를 든다.

“‘눈썹이라는 것은 눈 위에 있는 털’이라는 한 구절을 보아도 이런저런 의미가 떠올라 긴 봄날 하루 종일 꼬박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해가 저물도록 생각하고 같이 머리를 짜내도 매우 짧은 길이의 문장 한 줄 해석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세 사람은 그러나 ‘행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고 이루는 것은 하늘의 일이다’ ‘마음은 스스로 빛을 발한다’는 경구를 되새기며 작업에 매진했다. 1년 정도 지나니 번역어가 점점 늘어 읽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네덜란드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 수준이 좋은 교재와 사전을 갖추고 선생에게서 배운 정도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하루에 열 줄 이상도 큰 어려움 없이 번역할 수 있었다’니 말이다. ([번역과 근대2]에 계속)

칼럼니스트 백우진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smitten@naver.com

[사진=영화 <배를 엮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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