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관상’ 보고 주저앉아 울었던 사람이라면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역린>은 정조 즉위 1년(1777년)에 있었던 정유역변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정유역변은 정조의 서고이자 침소로 쓰이던 존현각에 자객이 침투했던 암살미수사건을 말한다. 정조는 정쟁으로 살해된 사도세자의 아들로, 세손시절부터 평생 암살위협에 시달렸다. 즉위 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보복정치를 펼 것을 두려워 한 노론 벽파세력은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였으며, 즉위 후에도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뭉쳐 정조의 개혁정치를 반대하였다. 1800년 정조의 사망 역시 암살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존재하며, <영원한 제국><한성별곡-正><정조암살미스터리-8일> 등의 작품이 모두 정조암살 모의를 모티브로 삼는다.

영화 <역린>은 1778년 7월 28일 하루 동안에 있었던 사건을 밀도 있게 그린다. 새벽에 일어나 정순왕후(한지민)에게 아침문안을 가서 미묘한 기싸움을 벌이고, 경연에서 신하들의 논리를 사서오경을 통해 논박하고, 군권을 장악한 무신과 활쏘기 대결을 벌이는 등 정조가 정적들과 벌이는 팽팽한 대결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한편 궁 밖에서는 자객에게 암살명령이 떨어진다. 당시 노론 벽파는 국혼을 통해 내명부를 장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시와 궁녀 등 궐내 모든 인력을 자신들의 사람으로 심어서, 미세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역린>은 왕과 정순왕후, 그리고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김성령), 홍국영 등 정사 속 인물들뿐만 아니라, 내시와 나인 그리고 자객 등 기록되지 않은 인물들을 창조하여 당시의 팽팽한 정치적 긴장관계를 그려낸다.

<역린>은 <다모><베토벤 바이러스><더킹 투하츠> 등 TV드라마를 연출했던 이재규 감독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최고의 배우들과 전문스텝들이 모여 만든 것에 비해 감독의 연출력이 다소 평면적이지 않았나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역린>은 최소 두 가지 미덕을 지닌다. 첫째는 생생한 인물 묘사를 통하여 정조역을 맡은 현빈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가 대단히 돋보인다는 점이고, 둘째는 단단한 결기가 살아있는 정치적 메시지가 무척 의미 있다는 점이다.



◆ 생생한 인물, 살아있는 연기

영화 <역린>은 기존 사극에 비해 인물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참신하다. 정조보다 불과 7살이 많았던 정순왕후는 “할마마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요염한 색기를 흘리며 정조를 떠보며 겁박한다. 흔히 노회한 권력자처럼 묘사되던 정순왕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묘사이다. 혜경궁 홍씨 역시 단순히 비운의 왕세자비로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역시 노론벽파 문중에 속한 자로, 남편을 잃는 대신 아들을 살리고자 하였던 모종의 거래가 정순왕후와의 사이에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역린>의 가설은 매우 신선하다. 이처럼 기존의 사극들과 달라진 인물묘사 속에서 배우들의 연기가 빛을 뿜는다. 한지민, 김성령의 연기는 물론이고, 나인 역할을 맡은 정은채, 자객 역할을 맡은 조정석, 의문의 노인 역할을 맡은 조재현 등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

그중에서도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한 현빈의 연기는 기대이상이다. 현빈은 왕의 얼굴로 분하여 등장한 첫 장면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사극 분장이 의외로 잘 어울리는 현빈의 준수한 얼굴뿐만이 아니라, 사려 깊고 진중한 표정은 관객을 압도한다. 특히 아버지의 사살이라는 심리적 상처를 딛고, 선정을 펴야 한다는 대의를 믿으며, 어려운 싸움을 계속 해나가야 하는 젊은 왕의 고독이 물씬 풍기는 눈빛은 관객을 몰입시키기에 충분하다. 정조가 문무를 겸비한 능력자였다는 역사적 기록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현빈은 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상의 탈의를 통해 보여주는) 완벽한 근육질의 몸매와 날렵한 무예까지, 가히 전인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가장 믿었던 내시와의 우정에서 비롯된 인간적인 고뇌나 혜경궁 홍씨의 불의한 행위에 거리두기를 하면서 보여주는 번민 등 절제된 내면연기도 일품이다.

현빈은 단순히 잘생긴 배우가 아니라, 굉장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 손꼽힐만하다. 현빈은 수려한 용모로 오히려 연기력이 과소평가되는 배우인데, 그의 연기에 대한 욕심과 섬세한 연기력은 이미 <나는 행복합니다> <만추> 등을 통해서 입증된 바 있다. 군복무에서 돌아온 뒤 첫 작품인 <역린>을 통해, 현빈은 100억 원의 제작비가 든 사극을 원톱으로 끌고 나갈 정도로 연기력이 출중한 배우로 검증받았으며, 이제 엄청난 티켓파워를 증명할 것이다.



◆ 난세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역린>은 암살 위협에 놓여있는 젊은 왕을 중심으로 정치적 갈등관계를 그려 보인다. 그러나 정순왕후와 노론벽파를 무조건적인 악으로 놓고 정조와 혜경궁 홍씨를 무조건적인 선으로 놓는 단순한 구도를 취하지 않는다. 정순왕후 대 정조의 대결은 당시의 정치적인 대립이었지 선악의 대립은 아니다. 영화에서 선악의 문제는 현재적 관점에서도 동의할 수 있는 휴머니즘의 문제를 거쳐 재사유된다. <역린>에서 정순왕후와 노론벽파와 혜경궁 홍씨 등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위해서는 아랫사람의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무지막지한 고통을 가하며, 자신들의 목적을 관철시키려 한다. 정조는 이러한 사고와 분명한 선을 그으며, 아직은 정적들의 권력이 막강한 와중에 작은 승리를 교두보 삼아 그들을 차츰 무력화시키며, 구악을 하나씩 일소해나가려 한다.

이것은 무도한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각성된 주체는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전한다. 특히 영화 <관상>의 메시지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관상>은 미래를 예측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무도한 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자가 느끼는 절망과 회한을 그린 사극으로, 현실의 관객들이 느끼는 정치적 허탈감과 공명하였다.



그런데 <관상>이 제시하는 아전인수 격의 단순한 선악구도(왜 수양대군은 악이고, 김종서는 선인가?)는 차분한 성찰보다 무조건적인 울분을 자극하는 것이었고, 이는 관객들의 정치적 울분과 허무감을 발산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울분과 허무감의 발산은 현실의 국면을 타개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린>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는 정조가 즉위한 첫해에 맞았던 위기를 보여주면서, 지극히 불리한 입장에서 출발한 정조가 첫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승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작은 승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차분히 미래를 다짐해나가는 정조를 통해, 관객들에게 용기와 더불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정조가 단단한 결기로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중용 23장은 다음과 같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관상>을 보고 주저앉아 울었던 사람이라면, <역린>의 메시지를 듣고 일어나야 한다. 거대담론과 정치공학에 휩쓸려 일비일희하지 말고, 약자들이 고통당하는 일상의 세계에서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하나하나 바꾸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남을 감동시키고,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해야 한다. 울지 말자. 이것이 우리의 일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역린>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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