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해부학 책 번역이 왜 일본 근대화의 출발이었나?[번역과 근대3]

[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 된 <난학사시>[번역과 근대2]에서 계속)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는 의술에 입문한 지 20년 지난 1771년, 그의 나이 38세 때 이 책을 입수한다. 단 한 글자도 읽지 못하는 책이었지만 내장이나 골격 그림이 이전까지 보고 듣던 바와 전혀 다르다는 점에 그는 충격을 받는다.

그 해 3월 어느 날 에도(江戶) 치안판사가 그에게 “내일 사형당한 죄수 시신을 해부한다”며 참관해도 좋다고 말한다. 스기타는 의학에 관한 열정을 나누던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에게 알려 함께 해부를 참관하러 간다. 이 때 마에노가 옷 속에서 책을 꺼내 “몇 년 전 나가사키(長崎)에서 구입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책이 바로 <타펠 아나토미아>였다. 둘 다 놀라며 감격한다.

둘은 해부된 시신이 중국 의학 서적과 다르다는 점에 또 놀란다. 중국 의학서는 폐는 여섯 장, 간은 왼쪽 셋 오른쪽 넷 이라고 설명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위장 위치와 형태도 달랐다. 그러나 네덜란드 해부도는 실제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골격도 옛날 책과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와는 일치했다.

일본 의사들은 이전에도 해부를 참관하고 중국에서 전해진 의서와 실제 인체가 다르다는 점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 여길 뿐이었다.

스기타는 마에노에게 <타펠 아나토미아>를 번역하자고 제안한다. 마에노가 동의하면서 번역 작업이 시작된다. 번역은 1771년 3월부터 1774년 8월까지 3년5개월 걸렸다.

스기타는 <난학사시>에서 “내가 원한 것은 인체 구조가 중국 서적에 기술된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난학사시>는 <타펠 아나토미아>를 <해체신서>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과정을 적은 회고록이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1890년 제1회 일본의학회 총회에서 <난학사시> 서문을 통해 “내외의 뜻 있는 여러분, 이 책을 의학상의 단순한 한 사건으로 보지 않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한다. 그는 “동양 국가인 일본의 100여년 전 학자 사회에 이미 서양문명의 싹이 있었으며, 따라서 오늘날의 진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세계에 제시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후쿠자와는 이 행사에 맞춰 자신이 서문을 쓴 <난학사시> 재판을 간행했다. 이 책은 스기타가 83세 때인 1816년에 썼다. 화재로 소실됐지만 사본이 발견돼 1869년에 다시 빛을 봤다. 이 때 출판도 후쿠자와가 주도했다. 그는 메이지(明治)유신 원년인 1868년에 스기타의 4대손을 만나 출판을 권유하고 비용을 댔다.

이종찬은 <난학의 세계사>에서 “<난학사시>는 도쿠가와(德川)막부 시대에 쓰였지만 이 책의 근대적 의미를 만들어간 것은 후쿠자와로 대표되는 메이지의 사상가들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이 틀리지는 않지만, <난학사시>가 설령 잊혔더라도 <타펠 아나토미아>가 <해체신서>로 번역된 것이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중화 중심주의와의 결별을 뜻했다. 일본이 실질과 원리를 추구하는 첫 걸음이었다.

일본이 중국의 구심력을 벗어나 실제 세계에 눈을 뜨게 된 다른 자극이 있었다. 서양에서 들여온 지도였다. 1582년부터 1590년까지 8년여 동안 동남아와 인도양, 아프리카를 돌아 로마 가톨릭 교황을 알현하고 돌아온 덴쇼(天正)소년사절단이 서양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를 가져온다.

일본이 표시되지 않은 지도였지만, 일본인들은 동남아 교역 경험에 비추어 그 지도가 중국지도보다 정확함을 인정했다. 이런 '지도상의 깨달음‘이 난학(蘭學)과 맞물려 확산되면서 중화적인 세계관을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스기타를 계승해 난학의 기초를 세운 오스키 겐타쿠는 <난학계제> 서문에서 “오랫동안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중국을 모방해왔으며 그들의 방식대로 마냥 즐겁게 지내왔다”며 “세계 지리를 보면 이런 우리 삶이 얼마나 엉터리였으며 눈과 귀로 직접 얻게 되는 지식을 방해해 왔는지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중국이 가장 문명화된 나라로 간주됐으나 네덜란드가 중국보다 낫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에는 과학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스기타의 난학은 당시 일본 체제에서 금기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체제는 제한된 가운데 선택적으로 필요한 서양 문물을 취하고 있었고, 스기타가 열어보인 진실을 받아들인다.

칼럼니스트 백우진 <안티이코노믹스><글은 논리다> 저자 smitten@naver.com

[사진=후쿠자와 유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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