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희야’ 김새론이 선량한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정주리 감독의 <도희야>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는 밟지 말아야 할 스포일러들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영화는 일종의 추리물이기 때문에 몇 가지 언급하지 말아야 할 부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나는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인 주인공 영남(배두나)이 왜 갑자기 대도시를 떠나 시골 바닷가 마을로 내려왔는가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된다. 사실 영화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냥 영남이 어떤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어떤 일이 있었을 거라고 언급하고 지나갈 뿐. 그래도 영남이 어떤 사람이라는 건 여전히 스포일러다. 마찬가지로 나는 영화의 다른 주인공인 도희(김새론)가 택한 마지막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말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필자는 이 영화와 내가 좋아하는 몇몇 영문학 작품과의 연결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 카슨 맥컬러스를 포함한 소위 ‘남부 고딕’ 장르의 작품들을 쓴 작가들. 하지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도희야>에 일어난 일들 상당수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느 나라이건 이런 종류의 시골 마을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심지어 시골에 국한되는 일도 아니라는 점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주제는 다수가 소수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마을은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도 노인네들만 남은 곳이다. 이 마을엔 외국인 노동자들을 제공하고 기타 문제를 해결해주는 젊은 남자가 단 한 명인데, 그가 용하(송새벽)이다. 용하에게는 남편의 폭력을 참지 못하고 달아난 아내가 버리고 간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가 바로 도희다. 도희는 용하에게 온갖 끔찍한 일을 당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이가 얻어맞는 걸 봐도 참견할 생각이 없다. (1) 남의 집 일이고, (2) 용하가 없으면 마을이 운영이 안 되기 때문이다. (3) 그리고 용하가 대주는 불법 외국인 노동자들을 부리고 그들은 이미 용하의 공범자이다.

익숙한 매커니즘이 만들어진다. 이 마을 사람들은 둘로 나뉜다. ‘보통 사람’과 그렇지 않은 소수들. 말이 소수이지, 이들은 다양하다. 외국인 노동자일 수도 있고, 왕따 소녀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이들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소수자이기 때문에 폭력을 휘둘러도 되는 존재이다. 무언가를 잘못 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그 특정인이 ‘다른 무언가’라는 것이 논점과 상관없는 협박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자주 보는 일이다.



<도희야>는 파출소장이라는 권위를 갖고 있지만 외지에서 젊은 여자이고 그 밖의 이유로도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마을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시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 중 몇 개가 강력 범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후반 이후로는 추리물 특히 하드보일드 필름 느와르의 성격을 갖는다. 중반 이후 이를 알아차리고 다시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느와르 영화의 공식을 따른 영화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의붓아버지에게 폭행당하는 가녀린 소녀라고 나오는 도희는 14살짜리 필름 느와르 팜므 파탈이다. 그리고 이건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도 필요없어요. 소장님만 있으면 돼요"라는 대사가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없는 아이한테서 나올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필자가 다른 관객들보다 <도희야>를 덜 결백한 영화로 보는 이유도 아마 그들과 내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보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와 같이 시사회를 본 동료 관객들은 장르보다는 주제와 드라마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그들은 영남과 도희에게 어떤 순결함을 본다. 부당한 이유로 끝까지 몰린 외로운 사람들이니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일단 용서가 되고 좋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긴 결말은 그 정도 상상이 가능할 정도로 열려있으니 틀린 생각이라고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나는 <도희야>를 시골 느와르 영화로 보기 때문에 주인공들에게 그렇게 관대할 수는 없다. 이 장르에서는 탐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검거나 회색이니까. 나는 여전히 영남이 이 영화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의심하는 도희와의 관계도 그렇게 결백하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도희는 여전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아이이며, 앞으로 계속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을 익히고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해도 아이의 마음 어딘가에는 지울 수 없는 어두운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의 결말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지어 나는 다른 관객들보다 더 낙천적인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도희에게서 진부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보통 사람들’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비정상의 힘을 본다. 나는 영남과 도희와 관계에서 그런 ‘정상성’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연맹을 본다. 여기에서 그들이 선량하거나 결백한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처음부터 그렇다고 믿지도 않으니까. 그 모든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서로가 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태도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뿐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도희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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