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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건 단순한 상상력의 차원이 아니다
기사입력 :[ 2014-05-31 11:21 ]


우리가 잃어버린 밀어(密語), 영화 <그녀>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진작부터 관심과 화제를 모아 온 스파이크 존스의 신작 <그녀>를 보고 있으면 어쩜 영화감독의 상상력이 이런 데까지 닿아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니 이건 단순하게 상상력이라고 해서는 안될 듯싶다. 스파이크 존스의 상상력은 재미와 신기의 차원을 떠나 인생에 대한 성찰, 세상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 아우라와 깊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실 <그녀>의 근본적 모티프는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남자가 자신이 사랑할 여자를 대체할 무엇인가를 꿈꿔 온지는 거의 인류 역사와 맞먹는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나는 당신에게 과연 어떤 존재인가요?”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을 이어갈 능력을 상실한다. 구속감을 느낀다. 어찌할 줄을 몰라 한다. 그녀(her)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자들은 결국,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상상처럼 ‘공기인형’과 같은 도구를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차라리 혼자서 즐기는 쪽을 택한다. 관계는 늘 불안하며 공포스럽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끝내지 못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남자든 여자든) 이제는 그 물적(物的) 대상에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인형에 인격화를 불어 넣는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다시 남자는 그녀(라고 생각하는 것)에게서 결코 벗어나지를 못하게 된다. 인형 역시 남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한테 과연 어떤 존재인가요?”

여기까지라면 <그녀>는 비슷한 류의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렇고 그런 작품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의 주인공 테오도르(호아퀸 피닉스)가 사랑에 빠진 컴퓨터 OS, 곧 인공지능 운영체제인 사만다는 ‘말을 한다.’ 진짜 여자처럼 테오도르에게 말을 걸고, 얘기를 나누며, 관계를 주도한다. 쌍방향 컴퓨터는 능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역시 사실은 테오도르가 그렇게 느끼고 착각하는 것뿐일 수 있다. 그래 봐야 컴퓨터 안의 신호체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사만다의 존재가 워낙 그럴 듯 해서 테오도르는 완벽하게 그녀를 의인화 하게 된다.



문제는 그가 그렇게 느끼는 순간부터 테오도르의 자아는 극도로 분열된다. 언제부턴가 사만다의 모든 얘기들이 OS에 프로그래밍 돼있는 데로 그에게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 조차 그의 환청이자, 착시이고, 상상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는 줄곧 자기 자신이지만 어떤 때는 사만다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혼자서 1인2역을 해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테오도르는 결국 남성성과 여성성을 번갈아 오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남자이면서도 상대 여성 곧 사만다처럼 생각하고 읽고 말하게 되고 그 반대의 입장으로도 자유자재로 오가게 된다. 아니,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사람이란 저렇게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지내는 것처럼 원래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몸, 곧 육체를 지니고 있지 못한 OS 프로그램 사만다가 테오도르와 잠자리를 하기 위해 자신을 대신할 인간 여성으로 하여금 그를 만나게 하는 장면은 이른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정점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쓰리썸(threesome)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그리 불쾌하거나 불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테오도르는 자신처럼 스마트폰 카메라와 이어폰을 장착한 채 사만다가 얘기(지시)하는 대로 몸을 맡기려는 여자를 편안한 마음으로 품지 못한다. 그는 ‘그녀’가 ‘그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아닌 그녀는 그런 그에게 곧바로 실망을 하고 떠난다. 테오도르는 이 일을 계기로 실재하지 않는 그녀, 사만다에게 점점 더 집착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고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마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보는 양 근(近)미래의 특이한 설정으로 비현실적이면서도 영화적인 스토리만을 풀어 나가는 척, 스파이크 존스의 <그녀>는 현실의 다양한 텍스트를 작품 전반에 깔아 놓는다. 영화가 매우 지적이고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독을 이렇게 처절하게 묘사한 작품도, 근래 들어 매우 보기 드물다는 느낌을 준다. 절절하다 못해 뼈에 사무칠 정도다. 그렇게나 사랑, 사랑 외치며 살아 가지만 현대인들 중 그 누구도 올바른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영화를 보는 내내 느끼게 된다.

사랑에 있어서 우리가 잃은 최고의 것은, 어쩌면 영화 속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나누는 것 같은, 밀어(密語)일 것이다. 사랑은 밀어다. 육체도 아니고 잠자리도 아니며, 돈이나 명예, 외모 따위가 아니다. 사랑은 밀어처럼,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그 간질거리면서도, 속살 같은, 그러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을 끝까지 같이 나누려는 진심의 마음이다. 성 행위가 좋은 것은 막 끝낸 후 부둥켜 안은 채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더듬더듬 상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이다. 우리는 그런 밀어의 가치를 잃어 버렸다. 밀어가 사라지면서 현대의 사랑과 그 모든 관계는 공창(公娼)보다 못한 지대로 추락해 버렸다. <그녀>를 통해 스파이크 존스가 복원하려 했던 것은 바로 그 같은 사랑의 밀어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밀어의 영화이며 밀어를 위한 영화이고 밀어에 대한 영화이다.

테오도르가 자신처럼 OS와 연애중인 컴퓨터 애니메이터 에이미(에이미 아담스)와 결국 어떤 관계로 발전해 갈지, 영화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돌이켜 보면 테오도르는 오프 라인에서는 사랑에 성공하지 못한다. 아내와의 사이는 금이 간지 오래고 별거 후 오랫 만에 만나는 뇌쇄적인 여인(올리비아 와일드)한테는 ‘나쁜 놈’ 소리를 듣는다. 테오도르는 온라인 속에서 사만다와의 사랑을 통해 새로운 성찰을 하게 되고 다시 오프 라인의 관계로 돌아가려 한다. ‘현실 공간 속 아내, 여인 사이버 여인 사만다  그 둘을 합친 에이미(그녀도 테오도르처럼 OS와 연애중이니까)’로 그는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결국 미래세계의 연애는 그 두 가지의 특성 모두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들 미래의 사랑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세계 어디쯤 위치하게 될까. 테오도르는 사만다(컴퓨터)와 에이미(인간) 중 누구와 더 오랜 관계를 가져가게 될까. 사만다의 실체를 알게 된 테오도르는 과연 ‘고전적인’ 인간관계로 되돌아 올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 역시 그럴 수 있을까. 사랑은 대체 지금 어느 지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사랑은 지금, 도무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테오도르가 일하고, 거닐고, 살아가는 미래의 공간으로 상하이가 설정됐다는 게 특이하다. 천박한 자본의 광기만이 번득이는 상하이를 스파이크 존스는 원래 그곳이 지녔던 고품격의, 세련된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테오도르 역의 호아킨 피닉스는 자신이 얼마나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인지를 다시 한번 입증해 내는데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사만다의 목소리 역을 맡은 스칼렛 요한슨은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당대 최고의 심벌임을 보여줬다. 에이미 아담스는 늘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며, 주연이든 조연이든 좋은 영화라면 가리지 않는 훌륭한 연기자임을 드러낸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한동안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나눴던 얘기들이 귓가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의 허어(her) 혹은 힘(him)을 찾게 할 것이다. 영화가 갖고 있는 놀랍고 무서운 능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찾게 만든다. 그것이 잃어 버린 것이든 아니면 새로운 대상이든. 모두의 사랑을 위하여. 고독한 현대인들의 위대한 연애를 위하여.

영화평론가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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