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미래 변화에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스파이크 존스의 신작 <그녀>의 국내 시사회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관객이 SNS에 'SF 같지 않은 SF 영화'라는 감상을 올렸다.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실수였다. 이런 말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던지면 검색한 SF팬들이 시비를 걸며 매달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비를 걸 만도 했다. 겨우 외계 로봇이 나오고 대재난 이후 미래가 배경이라고 <트랜스포머> 시리즈나 <다이버전트> 같은 작품들이 할리우드 SF 영화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그녀>는 너무나도 전통적이라 오히려 신기한 SF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테마는 인공지능과의 로맨스이다. 전통이 긴 서브 장르이다. 인간이 아닌 신기한 존재와의 사랑은 SF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을 매료시켜왔던 주제였다. 그런 만큼 쉽게 클리셰에 빠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상상 속의 욕망이 너무 커서 논리를 따르는 대신 그 욕망의 실현과 제재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중요한 것들이 간과되기도 한다. 사람이 인공지능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쪽은 어떤가. 그들은 왜 인간을 사랑해야 하는가. 그들의 애정은 성적인가? 성적이라면 그들은 성이 있는가? 목소리나 인공 육체가 한쪽 성의 특징을 담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욕망도 그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까?

스파이크 존스의 <그녀>에서 탁월한 점은 이런 모든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면서도 가능성을 차단하지 않고 사고의 방향을 열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외롭고 수줍은 대필작가 시어도어가 그가 새로 컴퓨터에 깐 자아가 있는 운영체계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고 연애를 하는 과정 자체에 집중한다. 그리고 시어도어에게 사만다는 '여자'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어도어에게 중요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인 로맨스가 보다 커다란 흐름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시어도어에게 소울 메이트처럼 느껴지는 사만다는 결코 시어도어 앞에만 나타난 기적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냥 돈을 지불하고 컴퓨터에 설치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그런 프로그램이 자아를 갖고 있고 인간과 연애도 가능한 것이다. 그 자아나 감정은 진짜인가? 아무도 모른다. (시어도어의 연애 이야기는 한 편의 긴 튜링 실험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이 돌이킬 수 없는 발전의 일부라는 것이다. 인간과 비슷하지만 육체의 제한이 없는 지적 존재가 인간과 지구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시어도어의 연애가 시작하고 끝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인간 진화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엄청난 속도의 발전을 이룩한다. 많은 SF 영화는 그 특별한 인공지능을 파괴해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오려 하지만 <그녀>의 세계에서는 그게 불가능해 보인다.



이렇게 되면 슬슬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 하나 있다. 레이 커즈와일. 스파이크 존스와 그의 이름을 함께 넣고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커즈와일이 쓴 <그녀>의 리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귀찮으신 분들은 다음 링크를 참고하시라.(http://www.kurzweilai.net/a-review-of-her-by-ray-kurzweil)

<특이점의 온다>의 저자가 스파이크 존스의 영화에 관심을 보인 건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존스가 <그녀>를 집필하기 이전에 커즈와일의 강연을 보고 그의 책을 읽은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다. 최근 SF에서 묘사하는 근미래의 묘사가 이전과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인다면, 그건 십중팔구 기술적 특이점을 다룬 커즈와일의 주장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스의 영화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예를 확인하고 싶다면 오리지널 <로보캅>과 최근에 리메이크된 <로보캅>을 비교해보라. 처음엔 SF의 아이디어를 빌린 귀신 이야기였던 영화가 기술적으로 그럴싸한 하드 SF로 탈바꿈한다. 그렇다고 리메이크가 더 좋은 영화라는 건 아니지만.

커즈와일의 주장은 월리 피스터의 <트랜센던스>에서 반복된다. 영화는 주인공 윌 캐스터의 입을 빌어 과학기술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인간 세계를 바꾸어 놓을 순간에 대해 언급하고 이를 '트랜센던스(초월)'이라고 재명명한다. 그냥 특이점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걸 이렇게 다시 부른 이유는 순전히 그게 더 좋은 제목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일차 주제는 고전적이다. 과학기술을 통한 죽음의 극복.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윌 캐스터는 반기술주의자들의 테러 때문에 시한부환자 신세가 된다. 그는 죽기 전에 아내 애블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자아를 컴퓨터에 업로드한다. 그의 자아가 들어있는 컴퓨터가 인터넷에 연결되면서 육체의 한계를 극복한 윌의 정신은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의심한다. 과연 업로드된 윌의 정신은 윌이 맞는가? 여기서도 튜링 실험의 테마는 반복된다. 심지어 애블린은 테러리스트에게 쫓기는 동안 튜링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한다.

앞에 언급한 관객의 눈으로 보면 <트랜센던스>는 <그녀>보다 더 정통 SF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히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 <트랜센던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녀>보다 떨어진다. <그녀>가 컴퓨터 운영체계와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단순한 컨셉을 잡아 이를 치밀한 논리와 심리묘사로 이야기를 발전시킨다면, <트랜센던스>는 컴퓨터에 업로드 되어 인터넷의 신이 된 남자라는 나름 거창한 아이디어를 잡아 이야기를 풀긴하지만 설정의 가능성을 제대로 살리기도 전에 미리 겁에 질린다. 과학적 상상력을 펼치는 대신 인공지능과 나노공학에 대한 기계적인 공포에 쫓기다가 엉겁결에 주저앉은 각본의 모양새는 여러 모로 그냥 딱하다.

<그녀>의 시대배경은 2020년이다. 커즈와일은 사만다와 같은 존재가 가능해질 시기를 2029년으로 잡는다. <트랜센던스>의 시대배경은 불분명하지만 역시 그렇게 멀지는 않다. 이들은 모두 레이 커즈와일에 따른 복음이다. 하지만 과연 정말 기술적 특이점 주장자들이 예언하는 미래가 오긴 할까? 커즈와일과 동료들의 예언은 계시록 예언과 비슷해서 은근히 종교적 분위기를 풍기며 바로 그 때문에 오히려 믿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하지만 아직 기술과학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으며 매 10년마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발전을 이룩한다. 비록 커즈와일이 예언한 것과 같은 모습은 아닐지 몰라도 무언가 다른 세계가 우리를 맞으러 오고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 그를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SF적 상상력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그녀><트랜센던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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