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남자’는 왜 제2의 ‘아저씨’가 되지 못했나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우는 남자>는 <아저씨>를 찍었던 이정범 감독의 차기작이다. <아저씨>는 당시로선 흔치않았던 역동적인 액션으로 사실감 넘치는 폭력의 미학을 보여준 데다, 꽃미남 배우 원빈을 잔혹한 킬러로 변신시킨 역발상으로 인해 많은 호평을 받았다. <우는 남자> 역시 잘생긴 남자의 대명사 격인 장동건이 킬러로 등장하는 액션느와르이니, 전작의 성공을 이어갈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우는 남자>는 어쩌면 ‘성공의 덫’에 걸린 실패의 전형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즉 전작의 성공요소를 답습하였지만, 결과는 실패이다. 그 이유는 첫째, <아저씨>의 성공 이후 국내액션느와르 장르가 빠르게 발전하여 <우는 남자>의 액션이 과히 놀랍지 않으며, 둘째 <아저씨>가 가지고 있던 서사나 인물에 대한 묘사가 <우는 남자>에서는 극히 무성의하게 처리되어 있어 관객들을 몰입시키지 못한다.

◆ <우는 남자> 왜 구해야 하는지가 빠져있는...

미국의 한 클럽에서 국제폭력조직이 밀거래를 하던 중 총격전이 벌어진다. 한국계 미국인 킬러 곤(장동건)은 조직의 돈세탁을 해주던 하윤국을 죽인다. 그런데 아뿔사 그 유탄에 맞아 하윤국의 어린 딸이 죽는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곤은 소녀의 엄마인 최모경(김민희)을 죽이고 계좌를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곤은 어린 시절 떠나왔던 한국에 투입되어, 최모경의 주위를 맴돈다. 금융회사 이사인 최모경은 죽은 딸의 흔적으로 괴로워하며 자살을 기도하는데...

<우는 남자>는 한국영화로는 드물게 총기폭력장면을 구사하고 있으며, 외국계 킬러와 흑사회 등 나름 글로벌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도둑들>이후 그것도 과히 놀랍지 않게 되었지만, 액션장면들은 그래도 칭찬할 만하다. 잔혹한 영상과 자극적인 사운드는 수위 높은 흥분을 안긴다. 장동건과 김민희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은 편이다. 특히 김민희는 슬픔, 절망, 긴장, 공포 등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장면들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하지만 <우는 남자>는 결정적인 문제를 지닌 영화이다. 가장 큰 패착은 서사의 당위성이 없으며 인물에 대한 묘사가 얄팍한데다 일관성도 없어서 관객들이 인물에 공감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곤이 왜 자신의 동료들을 배신해가면서 최모경을 살리려고 하는지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의 죄책감과 자살충동을 납득시키기 위해 개인사를 가미하지만, 그 개인사마저도 현재의 관계가 전혀 합이 맞지 않는다. <아저씨>에서 주인공은 끝까지 싸워야 할 명분이 있었다. 소녀를 구해야 하고, 아동폭력이라는 추악한 범죄 집단을 응징해야 할 당위가 충분했다. 게다가 주인공이 아내와 자식을 지키지 못한 가장이었다는 개인사도 소녀를 구하려는 의지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주인공이 소녀에게 느끼는 연민이나 미안함도 구체적인 사연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우는 남자>에서는 그 모든 것이 실낱같다. 소녀는 일찌감치 죽고 없고, 소녀에 대한 곤의 감정은 구체적인 실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 자기감정에 휩싸인 관념의 소산이다. 곤이 소녀에게 품는 감정은 ‘소녀라는 무고한 존재를 죽였다는 죄의식’이라는 관념에 과몰입한 결과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소녀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킬러인 탓에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곤경에 빠질 수도 있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이를테면 직업적 회의 혹은 신세한탄에 가깝다.

곤이 최모경에 대해 품는 감정은 더욱 모호하다. 소녀에 대한 애도와 죄의식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곤은 최모경의 슬픔에 공명하는데, DVD를 보며 우는 최모경을 훔쳐보며 슬퍼하는 곤은 흡사 유사부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도 억지스럽긴 마찬가지다. 곤은 어린 자신을 두고 혼자 죽으려던 엄마를 떠올리며 자기연민에 빠지는데, 여기서도 그의 엄마에 대한 기억은 최모경의 가족멜로와 전혀 맞물리지 못한다. 굳이 이해를 하자면, 엄마의 자살로 낯선 땅에서 잔혹한 킬러로 살아가던 곤이 무고한 소녀의 죽음이라는 직업적 낭패를 겪은 뒤 자기연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어린 시절의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모국에 돌아온 김에 자살적 충동을 이기지 못하게 되었다는 우울증의 서사를 추출할 수 있다.

<우는 남자>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외국에서 킬러로 살아가는 거친 남성, 원한의 감정이 가득하나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뛰어넘는 자살 충동, 그리하여 자멸의 서사, 허무감 작렬... 대략 이러한 뼈대를 지니는데, 이는 십년 전 장동건 주연의 <태풍>에서 익히 보았던 래퍼토리이다.



◆ 모성적 존재도 아니고, 팜므파탈도 아닌

곤의 입장이 이렇듯 허무할지라도, 최모경의 입장이 잘 살았더라면 조금 나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모경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처음 소녀의 엄마로 최모경이 제시되었을 때, 관객들은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모성애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노동자들의 생존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적 M&A를 펼치는 냉혈한 금융자본의 앞잡이이며, 상당히 화려한 삶을 살아간다. 그는 천억 원이 들어있는 계좌를 빼돌리는데, 그것이 어떤 욕망인지 영화는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 그는 단지 살기 위해 그렇게 한 것도 아니고, 자신을 속이고 무시한 상사를 골탕 먹이기 위해 그리한 것도 아니며, 공익을 위해 그리 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물욕 때문일 텐데, 영화는 결국 그 천억 원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는 것도 확실히 보여주지 않는다. 정말 그 천억 원은 어떻게 된 것일까. 천억 원의 행방이 별로 의미 없는 것이라면,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처절히 싸운 것일까.

영화가 최모경을 모성애적 존재나 연민을 자아내는 순수한 존재로 그리지 않을 것이라면 차라리 그녀의 능력과 매력을 강조하면서 범죄의 아수라장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멋진 언니’로 그렸다면 그녀를 응원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령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전도연이나, <도둑들>의 전지현이 승리를 거둘 때, 관객들은 약자의 성공이라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녀들을 응원한다. 하지만 최모경은 곤의 기이한 의지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총격전 속에서 살아남는 인물일 뿐, 그녀 자신의 욕망이나 매력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곤이 최모경에게 품는 감정이 무엇인지 조차 해명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의 생존을 무작정 응원하기도 어렵다. 차라리 곤이 최모경에게 매혹되었다고 한다면 한층 이해가 쉬웠을 것이다.



<우는 남자>는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엘리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서도, 그녀를 모호한 연민과 죄의식의 대상으로 소비해버린다. 그런데 그녀는 냉혈자본의 앞잡이로 그려져 있어서 정이 가지도 않는다. 영화는 최모경을 불쌍한 애 엄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혹적인 팜므파탈도 아닌 존재로 그리면서, 그녀에게 느끼는 곤의 모호한 감정을 관객들에게 억지로 들이민다. 대략 난감이다.

어찌 보면 <우는 남자>의 설정은 <이층의 악당>과 비슷하다. 외국의 밀거래에서 남편을 죽게 한 장본인이 한국에서 그의 처에게 접근하여 보물을 빼앗으려다가 감정적으로 얽혀 우호적으로 변한다는 설정이 유사하지 않은가. 실제로 로맨틱 코미디에 어울릴 법한 장면도 존재한다. 과묵해야 할 킬러 곤이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최모경에게 느끼한 작업남의 목소리로 “미네소타...한국의 향냄새, 목욕탕...” 어쩌구 하며 말을 거는 장면은 뭔가 코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요컨대 <우는 남자>는 <태풍>이 지닌 어마어마한 자기 파괴적 남성 신파의 정서를 끌고서 <이층의 악당>같은 로맨틱 코미디의 설정 속으로 들어온 기이한 형국의 영화이다. 영화는 이 모순에 대한 고민을 생략한 채 감정의 행간을 온통 액션으로 메우려 한다. 그러나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해소되지 않은 채 허공에 떠다니다, 마지막 목욕탕 회상장면에서 그저 헛웃음이 되어 내려앉는다. 궁극적으로 <우는 남자>를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는 ‘우울증’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이층의 악당>과 더욱 친연성이 있어 보인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우는 남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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