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남자’ 어떻게 이게 흥행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영화 장르에서 나르시시즘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쓸모없는 일이다. 카메라라는 도구가 발명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담았고, 그 발명품이 활동사진으로 발전한 뒤에도 그 경향은 여전히 남았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장 사랑한다.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이라는 동물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끝이 없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인간이라는 동물의 아름다움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영화 배우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그 경향은 더욱 노골적이다. 그레타 가르보, 알랭 들롱, 카트린 드뇌브, 이소룡, 아놀드 슈왈제네거에서 자기도취를 제거했다고 생각해보라. 꼭 미모나 몸매가 특출한 배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심지어 추남으로 유명했던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연기에도 무시할 수 없는 나르시시즘의 흔적이 있다. 자신의 모습을 영상에 투영하는 영화 배우들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이미지의 포로가 된다. 그건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단지 위대한 배우는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통제하는 법을 안다. 그 통제가 무조건 절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레타 가르보의 연기는 어떤 때는 거의 나르시시즘만으로 존재했지만 여전히,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웠다.

이정범 감독의 영화 <우는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르시시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를 지탱하는 것은 액션이나 드라마가 아니라 장동건이 연기하는 곤이라는 킬러의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일이다. 이정범의 전작 <아저씨> 역시 그런 영화였고, 장동건의 필모그래피는 자기 자신의 남성성에 도취된 근육질 캐릭터의 무한반복이다. 이 결합이 긍정적인 결과를 낼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우는 남자>에서는 아니었다.



늘 하는 말이지만 모든 것은 우선순위의 문제다. 이야기가 있는 영화라면 재료들을 어떤 우선순위로 쌓아야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아비정전>의 장국영이라면 맘보 춤을 추면서 한없이 자기 자신에 빠질 수 있다. 그 장면에선 그것 이외엔 다른 할 일도 없다. 하지만 주인공의 자기도취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면 나르시시즘이 일순위인 경우는 없다.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자기 자신의 근육질 육체에 도취된 배우지만 미래에서 온 로봇이나 외계인과 싸울 때에 그걸 정면에 드러내는 경우는 없다. 어차피 관객들은 그가 액션을 하는 동안 알아서 감탄할 것이다. 순수한 자기도취는 시간이 있을 때, 그러니까 동네 바이크족에게서 옷을 훔쳐있고 폼을 잡을 때나 잠시 하면 된다.

하지만 <우는 남자>에서 곤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 얼마나 멋있는지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인간이다. 이것만으로도 문제가 큰데 영화는 그런 그의 자기도취를 전적으로 지원한다.

상황을 보자. 곤은 영화 제목이 뜨기도 전에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 타겟을 제거하는 동안 실수로 어린 소녀를 총으로 쏴 죽인 것이다. 당연히 그는 죄의식에 빠진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임무가 떨어지니, 타겟의 전처이고 소녀의 엄마인 모경을 제거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강한 설정으로, 이 정도면 추가 설명 없이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곤이 해야 할 최선의 일은 일단 다른 악당들로부터 모경을 구하고 그 다음에 용서를 구하고 모경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에 불필요한 추가의미를 부여한다. 곤은 자신을 미국에 데려왔다가 자살한 엄마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야기기 진행되는 동안 엄마에 대한 기억을 모경에게 투사한다. 누가 봐도 멍청한 킬러의 실수 때문에 딸을 잃은 엄마의 비극적인 상황인데, 그는 은근슬쩍 자기 엄마를 집어넣어 자신을 주인공으로, 모경을 그 드라마의 조연으로 배치한다. 그러는 동안 자기가 죽인 어린 소녀는 얼렁뚱땅 잊혀진다. 이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여러 단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가증스럽다'라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는 액션을 보자. 곤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모경의 안전이다. 그 과정 중 악당을 죽여도 상관없지만 그건 모경을 구출한다는 목표를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이 우선순위가 깨진다면 모경이 더 위험해진다. 하지만 이 당연한 순서는 곤의 머릿속에는 들어있지 않다. 암만 영화를 노려봐도 모경의 안전은 기껏해야 3위이다. 우선 사람을 죽이는 것이 먼저이고 그 동안 자신이 멋있어 보이는 것이 다음이다. 그러는 동안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모경은 납치된다. (이런 상황은 이정범의 전작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원빈의 살인 대부분은 김새론의 구출이라는 일차목표와 별 상관이 없고 그는 그 구출이 그렇게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영화 막판을 보면 원빈이 저렇게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김새론이 알아서 빠져나갔을 거라는 인상까지 받는다.)



가장 나쁜 건 속죄 과정이다. 어린 소녀를 죽인 주인공이 여기서 속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있는 유일한 부모인 모경에게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모경은 그를 용서할 수도 있고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여기서 주체가 모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곤은 모경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있다.) 그가 속죄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둥절한 상황에 있는 모경에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는 자신을 총으로 쏘도록 명령하고 암시를 주는 것이다. 속죄를 한다면서 그가 하는 일은 겨우 모경을 자신의 폼나는 자살의 도구로 쓰는 것이다. 그는 소녀의 엄마 손에 죽었으니 나름 속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여기에서 모경의 의지가 무슨 역할을 하나. 괜히 애꿎은 사람을 어리둥절한 상황에서 살인자로 만든 것밖엔 없다. 이 선택이 더 고약한 이유는 모경을 죽일지도 모르는 킬러가 아직 하나 남아있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 킬러가 그의 친구라는 건 변명이 안 된다.

왜 이런 것들이 당연히 먹힐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긴 이 문제점 대부분은 그의 히트작 <아저씨>에도 그대로 담겨있었던 것이니 그는 그대로 한 번 더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캐릭터의 문제점만 본다면 <아저씨>나 <우는 남자>나 다 거기서 거기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교훈은 같은 거짓말로 관객들을 한 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두 번은 어렵다는 게 아닐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우는 남자>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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