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에서 <우는 남자>까지, 칭찬의 역효과

[엔터미디어=오동진의 이 영화는] 한국 영화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동안 지나치게 칭찬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올들어, 특히 최근 들어 발표되고 있는 한국 신작 상업영화들은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는 것은 물론, 평가에 있어서도 혹독한 점수들이 이어지고 있다. 그 강퍅한 평가들에 대해 다소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얘기들도 없지 않지만 대개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한국영화가 자기 환상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건 흡사, 1990년대 말의 홍콩영화계 분위기다. 당시 홍콩에서는 모두들 미친 듯이 누아르만 만드는 분위기였다. 자기 복제에 또 복제를 해대는 영화들에 관객들은 금새 식상해 버렸다. 홍콩영화처럼 한국영화도 지금 자기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는 남자>만 봐도 그렇다. 이정범 감독은 이번에 자신의 전작이자 기대 이상의 흥행작이었던 <아저씨>를 한편 더 만든 셈이 됐다. 자기 복제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흔히 빠지기 쉬운 유혹이다. 투자자들 혹은 제작자는 응당 그럴 수 있다. 안그렇겠는가. 전작이 워낙 흥행이 크게 된 터라 대중적으로 검증이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장동건에, 김민희에, 스타급 배우들이 줄줄이 캐스팅됐다. 당연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 줄잡아 10여 개가 넘는 투자사들, 영화 펀드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은 그 잠재적으로 높다고 보여지는 수익성에 다들 ‘숟가락을 얹히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들은 그렇다 치자. 감독만큼은 자기 복제를 극력 경계했어야 옳다. 감독은 늘 새로운 아이템, 그럼으로써 새로운 뭔가를 찾고,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정범 감독이 그 유혹에 굴복한 순간 <우는 남자>는 모든 것이 클리셰(clich)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대단히 공을 들인 모든 액션 시퀀스 조차 도무지 지루해서 볼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인물의 행동 동기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 문제다. 장동건이 맡은 ‘곤’이라는 이름의 킬러는 인정사정 볼 것 없는 인물이었다가 자신이 저지른 실수 한 건으로 모든 것을 뒤집는다. 어쩌다 아이를 죽이고 만 것인데, 그 속죄의 과정이 아무리 봐도 설득력이 약하다.



이정범 감독에게는 짐작컨대 몇 가지 트라우마가 존재하는 듯 하다. 특히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억눌린 잠재의식으로 상존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신의 영화에서 어린 아이라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식의 논리로 비약한다. <아저씨>에서의 김새론 역이 그랬다. <우는 남자>에서는 엄마인 김민희 역으로 그 범위가 확대된 듯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자꾸 이정범 감독이 ‘영화 속에서 지켜야 할 대상=그가 영화 밖에서 지키고자 하는 대중관객에 대한 조바심’처럼 느껴진다. <우는 남자>는 결국 감독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을 일반심리로 보편화 시키지 못한 채 급격하게 자기 우울증에 빠져 버린 것 같은 영화가 돼버렸다. 이정범 감독이 액션을 접고 한두 번 정도 장르를 바꿔야 할 시기가 왔음을 보여준다.

김대우 감독의 <인간중독>도 마찬가지다. 김대우는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스토리 텔러로서 인정받고 있는 감독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를 보면 그가 장고 끝에 악수를 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설정은 좋았다. 사랑은 중독이다. 그런데 사랑은 사람이 한다. 그러니 중독의 주체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그가 영화에서 보여 준 중독은 다소 지나치게 개인화된 취향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루이 말의 <대미지>나 잭클레이톤(아니면바즈루어만)의 <위대한 개츠비> 혹은 이안 감독의 <색계>에서처럼 인간이 지니는 그 뚜렷한 일탈의 욕망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김대우, <음란서생>과 <방자전>에서 그 섬세하면서도 강한 디테일을 선보였던 김대우가, 다소 쉽게 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게 한다.



영화 속에서 김진평(송승헌)이 종가흔(인지연)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과 떠나자고 하는 장면은 명백히 개츠비와 데이지의 마지막 장면을떠올리게 한다. 종가흔은 김진평에게 말한다. “그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아요.” 데이지도 개츠비를 그렇게까지 사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남편을 선택했다. 그런 여자를 보면서 사람들이 분노를 느꼈던 것은 데이지가 아니라 ‘뼈아픈 사랑의 지독한 현실성’이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로미오와줄리엣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이다. 그런데 <인간중독>에서는 그런 분노의 밀도감이느껴지지 않는다. 그 순간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감독은 여배우에게, 혹은 여배우가 맡은 극중 여인에게 보다 잔인하고 냉혹한 시선을 보냈어야 옳다. 김대우도 정치 스릴러와 같은 다른 장르로 보폭을 한번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처럼 보인다.

대중적인 평가에 있어 엇박자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장진의 <하이힐>은 일단 시도가 남다른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마초 형사가 사실은 트랜스젠더였다는 얘기를 할 때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것도 다른 감독이 아니라 장진이 그 같은 이종의 장르적 결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장진 감독이 페드로알모도바르의 영화에, 그런 류의 비슷한 이야기들에 탐닉하게 된 것일까. <하이힐>은 작품의 미학적 성과를 떠나 이런 시도는 계속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흥행 면에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여장남자에 대한 불편한 시선의 분위기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끝까지 간다>가 비교적 성공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이 영화 역시 할리우드의 수 많은 형사물들, 특히 누아르 계열을 참작하고 있는 작품이다. 의 제임스엘로이나 <조지 클루니의 표적>을 쓴 엘모어레너드 같은 작가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경찰 조직 내 뿌리깊은 부패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이들 작품이 매력이 있었던 것은 결국 사회적으로 규정화한 선악의 문제에 대해 깊은 회의와 성찰을 담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간다> 역시 그러한 철학을 좀더 밀어 붙였어야 옳다. 하지만 2%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스펜스적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그 톤을 유지시켰다는 점에서는 대중적인 성취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작품이긴 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이유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역린>에서 <우는 남자>에 이르는 일련의 한국 상업영화는 지나친 자기 환상의 늪에서 허덕이는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오히려 한국영화의 새로운 힘은 <한공주>나 <도희야>같은 저예산 작품들에서 그 빛을 발휘하고 있다. <한공주>는 마치 한국에서 벨기에의 작가주의 감독인다르덴 형제의 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희야>는 우리사회의 가장 끝에 있는 성적 소수자들의 모습을 한 시골마을의 비뚤어진 권력 구조 속에 밀어 넣고 우리사회 전체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그려내는데, 또 그에 동의시키는데 성공한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이 이제는 한국 상업영화계를 떠 안을 시기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페이지가 분명히 넘어가고 있는데도상업영화계만이 그 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조금 더 진지해져야 한다. 한 걸음 더 사회적 엣지(edge)를 구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상업영화들로서는 한국영화의 미래가 밝지 않다. 환상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할 때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ohdj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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