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유동근·정도전, 배우들의 시너지란 이런 것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사극 <정도전>에서 이성계를 연기한 유동근이 빛을 발한 첫 작품은 사극이었지만 젊은 시절 그가 오롯이 사극전문 배우였던 것만은 아니다. 1980년 TBC 23기로 데뷔한 유동근은 82년 사극 <꽃가마>에서 지금은 전설이 된 미녀배우 정윤희의 상대역으로 얼굴을 알린다. 83년 대형 교통사고로 4개월간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했던 그는 다음해 한말 개화기 시대를 다룬 작품 <꽃반지>에서 몰락한 양반 집안의 가난한 선비 숙주 도령으로 출연하면서 차츰 인기를 얻는다.

하지만 80년대 유동근이 주로 맡았던 역할은 사극의 인물이 아닌 현대극의 인물 그 중에서도 글을 쓰는 작가였다. 그는 84년부터 내리 3년 동안 현대극 여섯 편에서 작가로 등장한다. 미스터리물인 <안개>는 물론 잡지사 연재소설가로 등장한 <청춘일기>나 <금남의 집>, 발명가였다가 결국 작가로 전업하는 <여보, 미안해>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유동근은 인터뷰에서 생긴 것도 투박하고 글재주는커녕 말솜씨도 없는 자신이 작가 역할을 맡는 것이 희한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단 글 쓰는 폼만은 이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고 은근슬쩍 자랑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면 유동근은 그 시절 작가들의 글 쓰는 폼만이 아니라 자기가 창조해내는 가상의 인물에 ‘빙의’하는 작가들의 특성까지 몸에 익힌 건 아닌가 싶다.

20여년이 지난 뒤 KBS 사극 <정도전>에서 유동근이 연기하는 이성계를 보면 그렇다. KBS의 <정도전>은 중견배우들부터 젊은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사극 연기가 몸에 밴 배우들의 열연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유동근의 이성계는 다른 인물들과 조금 결이 다르다. 그건 유동근의 이성계가 함경도사투리를 써서만은 아니다.



물론 함경도사투리 덕에 <정도전>의 이성계는 독특한 매력을 품은 인물로 그려지긴 했다. 그건 이런 거다. 이성계는 사나이처럼 보이면서도 자신의 애틋한 감정들을 오롯이 전달한다. 만약 이성계가 정도전과 정몽주에게 속삭이는 우정의 대사들이 서울말이었다면 얼마나 낯간지러웠을까? 하지만 함경도사투리와 어우러지는 그 대사들은 뚝배기마냥 투박하면서도 뜨듯한 정감의 온도를 느끼게 해 준다.

“삼봉아우, 이 변변찮은 사람을 데리고 대업하느라 고생했지비.”

그리고 이 기존의 사극톤보다 살짝 뭉그러진 이 함경도사투리를 품고, 작가가 섬세하게 만들어준 대사들을 통해서 유동근은 이성계에 빙의한다. <정도전>에서 유동근은 역사 속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행적을 연기하기보다 이성계라는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힘쓴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유동근은 그냥 <정도전> 속 이성계가 된 듯하다. 그런 까닭에 시청자들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의 순간이지만 너무 생생해서 섬뜩섬뜩한 장면들과 마주한다. 정몽주의 죽음에 몸서리치고 괴로워하며 아들 이방원에게 분노를 퍼붓는 이성계가 그러했다. 또 임금이 된 후 새장에 갇힌 새 신세라며 한탄하는 모습이나, 저잣거리에서 ‘성계탕’ 이야기를 듣고 국 한 숟가락을 입에 물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서는 살아 있는 인간의 비애가 고스란히 그려진다. 사극 속 인물이 사극의 연기 방식을 유지하면서 역사 속 인물이 아닌 살아 있는 인간으로 다가오는 건 그렇게 흔치 않은 순간이다.



반면 조재현이 연기하는 <정도전>의 정도전은 유동근이 연기하는 이성계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사실 젊은 시절의 조재현은 유동근과 비교하면 TV에서 그렇게 익숙한 배우는 아니었다. 1987년 겨울 조재현은 KBS의 5부작 반공드라마 <비극은 없다>의 주인공으로 9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으로 뽑힌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이 작품의 주인공은 조재현이 아닌 다른 배우로 뒤바뀌고 시청자들이 조재현을 TV에서 만나는 건 그 후로도 시간이 제법 흐른 뒤다.

대신 조재현은 대학로의 연극배우로 유명세를 쌓는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말 6마리의 눈을 꼬챙이로 찌른 소년 앨런이 등장하는 연극 <에쿠우스>다. 순수한 마음과 비틀린 정신세계를 함께 지닌 소년 앨런과 그 앨런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는 다이사트 박사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극이 진행될수록 짐작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앨런과 상담하고 앨런의 말을 들으면서 오히려 다이사트 박사가 자신이 믿는 정상적인 세계에 의문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백성을 위한 나라를 꿈꿨던 정도전 역시 당시로는 말의 눈을 찌른 앨런만큼이나 비정상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물론 고려 말 조선 초가 아닌 지금의 정도전은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이지만 말이다.



조재현은 <정도전>에서 시대를 앞서간 ‘미친 놈’이라 손가락질 당했을 정도전을 시대와 맞섰던 이성적인 인간으로 해석해서 연기한다. <정도전>에서 주인공 정도전은 어딘지 껄끄럽고 어딘가 거스러미처럼 느껴진다. 그의 눈빛, 태도, 말투 모두가 그러하다. 심지어 그는 사극이란 장르 특유의 관습적인 어조마저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런 까닭에 조재현의 정도전은 이 드라마에서 현대적 인간이란 독특한 지위를 얻는다. 더불어 다른 인물들이 그 세계 안에 녹아들어 있다면 우리는 정도전이란 인물을 통해 <정도전>이 보여주는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어떤 틈을 발견할 수 있다.

<정도전>은 이 두 대척점에 있는 연기방식의 배우가 함께할 때 더 빛을 발한다. 임금이란 역할보다 감정 있는 인간에 방점이 찍힌 이성계는 “그건 개나발이오다.”나 “주원장, 종간나새끼!” 같은 대사를 감정에 가득 실어 내뱉는다. 정도전은 사극에 등장했던 어떤 신하와도 달리 임금 앞에서 쫄지 않고 자박자박 도전적으로 자신의 비전을 제시한다. “임금은 아끼고 재상은 다스립니다. 그것이 조선이 다른 점입니다.” “진정한 재상은 잘못된 임금의 말은 따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드라마 <정도전>은 두 배우를 통해 사극의 호흡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분노할 줄 알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의 호흡을 보여준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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