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수’, 이럴 거면 뭐하러 바둑을 소재로 했나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신의 한수>는 내기 바둑을 소재로 한 범죄액션영화이다. 유성협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퀵><뚝방전설>을 찍었던 조범구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정우성, 이범수, 안성기, 김인권, 이시영, 최진혁 등 비중 있는 배우들이 한꺼번에 출연하는 데다, 바둑과 액션을 결합한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내기바둑으로 형을 잃은 프로바둑기사가, 복수를 꿈꾸며 강호의 숨은 고수들을 불러 모아 형을 죽인 일당을 상대로 크게 한판을 벌인다는 줄거리는 익숙하면서도 흥미롭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만큼 재미있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영화가 그린 내기바둑의 세계가 선뜻 와 닿지 않으며, 둘째,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부족해 이들의 욕망이나 동기를 이해하기 어렵고, 셋째, 바둑과 폭력의 결합에서 바둑은 그 자체로 의미를 생성하지 못한 채 폭력에 함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 내기 바둑의 세계?

흔히 바둑은 정적인 두뇌 스포츠로, 신선놀음에 비유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내기 바둑의 세계가 있었으니, <신의 한수>는 그 내기 바둑을 둘러싼 사기와 폭력과 복수를 그린 범죄액션물이다. 시나리오를 쓴 유성협 작가가 내기 바둑의 세계를 취재했고, 제작진이 한국기원의 감수를 받아 리얼리티를 구현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영화가 그려낸 내기 바둑의 세계를 보며 리얼리티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영화가 실제 내기 바둑의 세계와 다르게 묘사되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게 아니다. 실제 내기 바둑의 세계를 누가 그리 잘 알겠는가. 문제는 영화가 그리는 내기 바둑의 세계가 만화적인 서사와 평면적인 인물에 의해 묘사되기 때문에, 어떠한 리얼리티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액션영화 혹은 만화나 웹툰이 취하는 관습적인 장르를 따를 뿐, 현실세계의 질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것은 치명적인 패착이다. 비슷한 장르의 영화 <타짜>가 그리는 화투도박의 세계는 얼마나 사기와 폭력이 난무하는지 익히 들어서 알기 때문에, 그 세계를 굳이 리얼리티적인 질감을 살려서 그릴 필요가 없다. 모두 안다 치고, 만화적이고 장르적인 질감으로 재구성해도 리얼리티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기 바둑의 세계는 생소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낯선 세계를 납득시키기 위해 현실감 있는 화면을 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물론 내기 바둑의 세계도 그리 낯선 것이 아닐 수 있다. 장르가 무엇이든 내기를 걸면 결국 도박의 양태를 띠게 되리라는 건 추측할 수 있다. 일단 도박의 성격을 띠게 되면, 사기나 폭력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내기 바둑의 세계를 굳이 모른다고 할 것도 없다. 하지만 바둑은 운이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어서 사행적 기대심리가 적고, 한 게임당 걸리는 시간이 길어서 판돈의 회전속도가 느리다. 이러한 특징은 바둑이 도박의 종목이 되기에 부적합한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기 바둑이 존재하는 데에는, 일반적인 도박과는 다른 내기 바둑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 특징에 대해 더 깊이 다루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머리로만 하는 싸움이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CEO들이 자기를 과신하여 덤볐다가 개털 된다”는 정도의 설명이 있을 뿐이다. 영화 속 바둑은 내기 혹은 사기의 수단으로만 쓰이고, 이를 빌미로 한 폭력은 점점 더 잔혹해진다.



◆ 그들은 왜 싸우는가?

영화는 처음부터 어수룩한 프로바둑 기사가 영문도 모른 채 형의 내기 바둑에 끌려가 원격 으로 훈수를 두다가 적발되어 가혹한 폭력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형은 결국 끔찍한 폭행을 당해 사망하고, 태석은 한 쪽 눈의 시력을 잃는데, 영화는 그들이 왜 형을 그토록 잔혹하게 살해했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단지 내기바둑에서 졌고, 진 사람이 걸었던 판돈이 가짜였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처음 보는 동생에게 살인누명을 씌우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이 원하는 것이 바둑일까, 돈일까, 아니면 폭력일까. 그들은 내기 바둑을 두는 불법도박장을 운영하면서, 고객의 돈을 갈취한다. 종목이 바둑일 뿐, 일반 조폭과 다를 바 없다.

살수(이범수) 일파의 사람들 중 독창적인 개인성이 느껴지는 인물은 거의 없다. 팜므파탈 역할의 배꼽(이시영) 역시 미스터리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제소자 중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없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쉽게 잡히지 않으니까”라는 대사는 멋지지만, 영화는 스스로 그 말을 우습게 만든다. 바둑을 잘 두는 살수 일파 중 누구도 두뇌를 쓰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평면적인 캐릭터들로, 그들의 욕망이 돈인지 폭력인지도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맹목적으로 그려져 있다. 태석의 캐릭터 역시 평면적이다. 그는 복수의 일념으로 살수 일파를 죽이려는 게임 캐릭터 같은 완전체일 뿐, 내면적 고뇌 따위는 없다. 그의 내면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배꼽과의 키스신도 CF처럼 공허하다.



◆ 바둑을 빙자한 폭력만 남아

영화는 바둑의 용어를 각 챕터 별로 사용하면서, 한껏 바둑의 분위기를 풍긴다. 마지막 액션 장면도 흰돌과 검은 돌의 격돌로 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살렸다. 그러나 영화에서 바둑은 그런 양념으로만 활용될 뿐, 영화의 본질은 바둑이 아닌 폭력이다. 살수 일파는 바둑을 빙자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모리배에 다름 아니다. 태석 역시 복수라는 화두가 중요할 뿐 바둑은 그들을 만나기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 영화는 신선놀음이라는 바둑을 두는 사람들이 왜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지 그 아이러니한 결합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바둑을 종목으로 삼는 사기도박과 폭력의 세계를 스케치하면서 만화적 쾌감을 얻고자 했을 뿐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른다. 바둑을 잘 둘 정도로 두뇌가 뛰어난데다 싸움을 잘 할 만큼 몸도 좋은 사람들이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가? 수십억이 오가는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왜 저런 지저분한 장소에서 왜 저런 질 낮은 삶을 사는가. 머리도 쓸 수 있고, 몸도 쓸 수 있으며, 심지어 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지능과 체력과 재력을 기껏 내기 바둑과 폭력에 탕진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원래 내기·도박·중독의 세계는 종목을 불문하고 다 그렇다고 메디컬 적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영화로 재현되는 과정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신의 한수>는 바둑이나 내기바둑의 세계를 몰라도 그럭저럭 재미가 있을 만큼, 장르적인 안정성을 기해 만들어졌다. 태석(정우성), 꽁수(김인권), 주님(안성기)의 캐릭터는 매력적이고, 연기도 나무랄 데 없다. 그러나 영화가 화두로 삼고 있는 바둑에 대해서는 도박과 폭력의 빌미로만 사용했을 뿐, 바둑의 세계가 품고 있는 정수를 보여주지 못한다. 하물며 ‘신의 한수’라는 제목이 지칭하는 비기(秘技)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신의 한수’를 꼽으라면 그냥 정우성과 김인권 캐스팅이 아닐까 싶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신의 한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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