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이순신을 민족주의의 아이콘서 해방시키다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명량>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전쟁영화이다.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의 해전상황을 스펙터클하게 재현하면서, 상당히 충실한 고증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생생히 살려낸다. 영화는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이순신과 함께 했던 민초들의 삶을 비추는 방식을 통해, 이순신이 품었던 ‘왕이 아닌 백성을 향한 충’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해낸다. 영화는 그동안 ‘민족의 영웅’이라는 표상으로 박제되어 있던 이순신에게 새로운 의미와 생명을 불어넣는다. 즉 ‘임금이 아닌 백성을 향한 충’이라는 개념을 통해, 왕조 중심의 역사적 의미나 민족주의적 가치를 넘어서는 보편성과 숭고함을 건져낸다.

1. 스펙터클은 물론이고, 고증에 충실한 재현

명량해전은 세계 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3년부터 교착국면에 접어들고, 1597년에 일본군이 재침해 옴으로써 정유재란이 시작된다. 1592년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이순신은 한산도 대첩 등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나, 1597년 어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압송 당한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풀려난 이순신은 권율장군이 이끄는 육군에 백의종군한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조선수군은 궤멸상태에 놓인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은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12척의 배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 330척에 이르는 일본수군을 완파시키는 믿을 수 없는 전과를 거둔다.

영화 <명량>은 1597년 한양으로 압송되었다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이 칠천량 전투에서 패주한 수군들과 12척의 배를 수습한 뒤, 명량에서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스펙터클한 해전 장면은 물론이고, 당시 이순신과 조선수군이 처한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불과 12척으로 330척에 달하는 일본수군과의 싸움을 앞두고 있던 조선수군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수군을 포기하라는 왕명이 내려지자, 탈영과 도주가 속출하는데 이는 역사적 고증에 의한 묘사이다. 실제로 칠천량 전투에서 12척의 배를 끌고 도주하였던 배설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야밤에 도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거북선을 불태우고 안위의 화살에 죽는 것은 사실과 다르지만, 이미 한산도에서 군량과 무기를 불태웠던 자이며 후일 권율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점에서 완전한 왜곡은 아니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고 상소를 올린 뒤 출전한 전투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이 수백 척의 일본 배들과 싸우는 동안, 11척의 배들이 겁을 먹고 후방에 물러나 있었다는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이다. 전투가 시작된 지 몇 시간 동안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고, 조류 역시 유리하지 않았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대장선이 죽기 살기로 싸우며 버틴 지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른 배들도 전투에 참가해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일본 최고의 해적가문인 구루지마 형제가 당항포해전과 명량해전에서 각각 죽은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2. 격군까지 보듬는 생생한 이순신 리더십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이순신과 조선수군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도저히 살아날 길이 없을 것 같은 전투를 앞두고, 이순신은 두려움을 용기로 전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감독의 전작 <최종병기 활>의 명대사 “바람은 계산되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이다”가 그러하듯,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것이 두려움이 극복된 상태를 이른다. 이순신은 “사즉시생, 생즉시사”라는 말로 병사들을 독려한다. 어차피 살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어차피 죽을 바에야 명예롭게 죽기를 각오하며 더 이상 목숨에 연연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말로 설득되는 것이랴. 이순신은 “사즉시생”의 경지를 몸소 보여줌으로써, 병사들을 감화시킨다.

영화는 이순신이라는 걸출한 전쟁영웅을 그리면서도, 전투가 한 사람의 뛰어난 장수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종일관 일깨운다. 영화는 도입부에서부터 병사들의 사기와 장수들의 자중지란을 보여준다. 급기야 군영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통해,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병사들이 각기 다양한 입장을 지니고 있으며, 장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무공이나 지략이 아니라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리더십임을 일깨워준다.

이러한 메시지는 매우 소중하다. 가령 고대 전투를 그린 영화 <트로이>에서, 전쟁영웅 아킬레스는 대단한 개인기를 발휘하지만 병사들과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는다. 그는 병사들을 설득하고 이끄는 장군이 아니라, 마치 현대의 스포츠 스타처럼 심드렁하게 출전을 미루다가 미친 듯이 전장을 누벼 명분 없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트로이>에서 아킬레스를 제외한 어떤 장수나 병사도 전쟁의 명분이나 죽음을 고민하지 않는다. 장수들은 다만 그 자리에 있는 고정된 인물들이며, 병사들은 아예 CG처럼 보인다.

그러나 <명량>에서 병사들은 소모품이 아니다. 이순신은 자신의 병사들을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따르게 한다. 영화는 전쟁에 자원한 청년이 격군이 되어 이순신의 대장선 밑바닥에서 손에 피가 나도록 노를 젓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배 위에서 지휘하는 장군이나 갑판에서 백병전에 나서는 병사뿐만 아니라,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격군들의 모습까지 사려 깊게 카메라에 담는다. 이순신의 대장배가 ‘충파’와 같은 위험한 전술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격군들의 혼연일체 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3. 민족주의의 아이콘이 아닌 숭고한 개인으로

이순신이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즉시생’의 리더십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마침내 백성들까지 감화시킨다. 영화는 이순신과 백성과의 교감을 통해, ‘민족의 영웅’으로 박제화되어 있던 이순신을 인류애적 보편성을 지닌 숭고한 개인으로 재조명한다. 즉, <명량>은 이순신이 구하려던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숙고함으로써, 이순신을 민족주의의 아이콘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영화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다는 자막과 함께 고문당하는 이순신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그동안 민족의 영웅이자 국가주의의 아이콘인 이순신이 당시 왕권과 불화하였다는 불편한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며 영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순신 아들의 입을 통해 묻는다. “그런 왕을 위해 왜 목숨을 버리려 하는가?” 이순신은 ‘충은 임금이 아니라 백성을 향한 것이다’라고 답한다. 즉 선조라는 왕이나 조선이라는 왕조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운명 공동체에 속한 백성들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는 왕조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백성에 대한 충성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순신은 왕과 불화하며, 백성과 혼신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싸운다. <명량>은 그동안 국가주의적으로 해석되었던 ‘충’의 의미를 고통 받는 민중을 구하고자 하는 인류애적 보편 윤리로 재전유한다. 이순신이 회오리치는 바다에 끌려들어가다가 백성들에 의해 구조되고, 조류의 변화가 아닌 백성들의 도움을 천운으로 여기는 것이 보여주듯, 이순신은 단지 지략에 뛰어난 지장이거나, 죽음을 무릅쓴 전투를 벌이는 용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과 진심으로 교감하는 덕장임을 알게 해준다.

이순신은 불가능에 가까운 승전을 거둔 뒤, 만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쌓인 원한들을 어찌 할고”라고 낮게 읊조린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무자비한 살육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걸고 싸운 한 숭고한 인간이 전쟁으로 죽어간 뭍 생명들을 기리며 하는 말이다. 광화문에 동상으로 서 있던 이순신 장군이 내려와 저기 눈앞에 걸어가는 듯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명량>스틸컷]

저작권자 ⓒ '대중문화컨텐츠 전문가그룹' 엔터미디어(www.entermedia.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저작권자 © 엔터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