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의 거리’ 주연 부럽지 않은 특급조연 3인방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어쩌면 JTBC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의 주인공은 유나(김옥빈)만이 아니라 ‘유나의 거리’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골목길, 차차차콜라텍, 노래방, 고물상, 공원 등등 유나의 거리 곳곳엔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유나의 거리>의 매력, 혹은 작가 김운경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개성 혹은 꼬질꼬질함을 톡톡 끄집어내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것. 그러면서도 그 사람만 튀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녹여내는 것.

그런 까닭에 <유나의 거리>에 출연하는 소위 명품조연으로 불렸던 이문식, 조희봉, 그리고 잊힌 배우처럼 여겨졌던 정종준은 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빛을 발한다. 그들은 <유나의 거리>에서 명목상 조연이지만 사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주인공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우선 이문식과 조희봉은 지금껏 그들이 조연으로 연기한 인물들에서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이문식의 역할은 깐죽이었고 조희봉은 대개 민폐였다. 그들은 이런 특징을 지니고 드라마나 영화에 짤막짤막하게 등장해 즐거움을 주는 인물들을 연기했다. <유나의 거리>의 작가는 만복과 계팔을 통해 그들이 연기해 온 캐릭터에 삶을 입힌다. 그리하여 깐죽거리는 인물은 전직 건달이었던 한 집안의 가장이자 차차차콜라텍의 사장으로 변신한다. 민폐였던 인물은 여전히 민폐지만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해 개를 끌고 다니는 외로운 백수 삼촌으로 변신한다.

드라마의 초반부 이들은 <유나의 거리>에서 가장 몰인정하고 꼴 보기 싫은 인물들이었다.차차차콜라텍의 짠돌이 사장 한만복(이문식)은 아내나 딸에게는 권위적으로 굴기 일쑤였다. 거기에 주인공 김창만(이희준)을 자신의 딸인 한다영(신소율)이 좋아하는 걸 눈치채자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창만을 괴롭힌다. 하지만 작가는 <유나의 거리>가 진행될수록 건달로 살아와 늘 누가 나를 헤칠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지니고 사는 이 남자의 삶을 은근슬쩍 노출시킨다. 또한 드라마 중반부에 이르면 이 남자의 또다른 일면들을 슬그머니 보여준다. 핏줄도 아닌 건달 시절 자신의 보스였던 장노인(정종준)을 모시며 그에게 투정부리는 모습 같은 것들 말이다.

최근 이 건달 아빠 만복은 초등학생 아들이 아빠 등에 새긴 호랑이 문신 때문에 목욕탕에 함께 가기를 꺼린다는 말을 듣고 좌절한다. 이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내가 목욕탕 탈의실에서 어린 아들을 피해 슬그머니 숨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백미다. 이 모습을 보고 장노인은 이렇게 일갈한다. “호랑이보다 자식이 더 무서운 거야. 아들 이기는 애비는 없는 거야.” 그 다음 장면 목욕탕에서 창만과 함께 즐겁게 목욕하는 아들을 보고 만복은 이렇게 구시렁거린다. “아비가 자식한테 가지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인가 모르겠네.” 원래 건달의 미소와 귀여운 표정을 함께 지닌 배우 이문식은 이처럼 만복을 통해 본인의 매력을 한껏 발휘하는 중이다.



배우 조희봉 또한 개삼촌 홍계팔 역의 정말 적역이라 할 수 있다. <유나의 거리> 전에도 조희봉은 잔머리로 술수를 쓰다 금방 들켜 주인공에게 손바닥을 싹싹 비는 인물을 자주 연기해왔다. 하지만 조희봉은 그런 인물의 일상까지 디테일하게 잡아 낸 개삼촌을 연기하기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음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유나의 거리>를 보다보면 조희봉이 최적의 캐릭터로 해석해낸 개삼촌이 그저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눈치 없는 인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조희봉 아니 개삼촌의 표정, 눈빛, 미소를 보다보면 희한하게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최근 개삼촌을 위한 멋진 장면 하나를 선물해 준다. 바로 옥상에서 빨래의 두 팔을 잡고 혼자 살사를 추는 개삼촌의 장면이 그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늘 지질하게 살 것 같은 개삼촌의 행복한 모습을 슬쩍 노출시키는 그것도 꽤 아름다운 한 컷이었다.



‘TV손자병법’의 정종준은 옛날부터 꽤나 희한한 캐릭터의 남자배우였다. 언뜻 백일섭과 비슷한 거구이지만, 전자가 탄탄한 고기 같다면 이쪽은 두부와 비슷했다. 두부란 그러하다. 흐물흐물하고 맛도 밍밍하지만 사람들의 입맛을 다독이는 담백한 풍미가 있다. <유나의 거리> 전직 건달 장노인도 비슷하다. 정종준이 연기하는 장노인은 이 드라마에 없어도 될 것 같지만 막상 빠져버리면 이 드라마에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을 것만 같다.

더구나 그는 도끼로 밤거리를 휘어잡은 건달이지만 허세에 쩐 노인은 아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넓은 등판에 도끼를 문신으로 새기려다 일본인 문신술사가 잘못 들어 토끼를 그려 넣게 된 전직 건달이다. 사실 상 도끼 형님이 아니라 토끼 형님인 셈이다. 그런데 등판에 이 토끼가 의외로 장노인의 성격을 제대로 설명해준다.



혹은 조물조물 토끼풀을 씹듯 눙치며 내뱉는 정종준 특유의 대사에도 어울린다. 그는 이 말투로 이 드라마의 수많은 인물들과 때론 선문답 같은 대사들을 나눈다. 또한 그 대사는 세상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도끼였다가 이제는 작은 철장에 갇힌 토끼 신세가 된 노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이 느긋한 목소리로 자신의 단칸방에서 함께 사교춤을 추던 콜라텍 매점에서 일하는 짱구엄마의 가슴팍이 넓다는 칭찬에 화답한다. “그럼, 기대. 넓은데 뭐 어때.”

이제 거의 후반부에 접어든 <유나의 거리>는 최근 치매의 징조가 보이는 장노인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드라마가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이 기억을 잃어가는 장노인과 만복 사이에 슬픈 드라마가 이어지리라 예상해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피보다 진한 의리로 엮였던 두 사내들의 으리으리하게 먹먹한 그런 드라마 말이다. 그러니 이 장면들을 놓치지 말라고 광고하고 싶다. 영혼 없는 호평기사들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널리 알리고 싶을 만큼 <유나의 거리>는 꽤 괜찮은 드라마니 말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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