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가 천박하게 인용되는 게 과연 나쁜 일일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작가가 자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가장 좋아할 때는 계약서를 쓰고 돈을 받았을 때이다. 일단 주머니가 두둑해졌고, 앞으로 자기가 만든 캐릭터와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생각을 하면 저절로 흥분이 된다. 하지만 각색 작업이 진행되고 배우들이 캐스팅되다보면 지금까지 기대가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그 어느 것도 기대만큼 좋을 수는 없다.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다. 헤밍웨이는 하워드 혹스가 감독한 <소유와 무소유>가 자기 소설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도널드 웨스틀레이크는 자기가 리처드 스타크 필명으로 쓴 <인간사냥>을 쓰레기라고 생각했다지만 존 부어먼이 각색한 <포인트 블랭크>는 걸작이라고 선언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얼마 전에 개봉한 <툼스톤>도 원작자 로렌스 블록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하지만 원작자와 영화의 관계는 자주 껄끄럽기 마련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은 호러 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원작자 스티븐 킹은 수십 년째 맹렬히 싫어하는 중이다. 영화 제작 당시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세이빙 미스터 뱅크스>가 후반부를 적당히 미화하긴 했지만, P. L. 트래버스는 디즈니 영화판 <메리 포핀스>를 진심으로 경멸했다. 내가 아는 이야기 중 가장 끔찍한 건 핵전쟁 SF <그날이 오면>과 관련된 것인데, 이 영화의 원작을 쓴 네빌 슈트는 스텐리 크레이머가 에이바 가드너, 그레고리 펙, 안소니 퍼킨스, 프레드 아스테어와 같은 쟁쟁한 할리우드 스타들을 기용해 만든 자기 소설의 영화판 각색이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만 병을 얻어 죽어버렸다!



영화를 싫어하는 원작자를 한 명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은교>의 작가 박범신은 다음과 같은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ParkBumshin: "은교"를 쓴지 5년이 넘었고 그새 나는 4권의 장편을 더 썼다. 그런데도 저급한 비유와 스캔들로 "은교"이름이 여전히 번지고 있어 때로 맘을 다친다. 영화탓일까. 깊은 슬픔으로 쓴 소설인데. 문학으로서 말하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은교를 버려주길.

그리고 몇 분 뒤, 다음 글들 추가했다.

@ParkBumshin: 작가~독자 사이 오해는 필연이다. 은교~경우도 그렇다. 좋은 독자의 오해는 작품 의미를 확장시키기도 한다. 문제는 영화만을 보고 원작을 안다고 느끼는 무지한 착각이다. 심지어 영화도 보지 않고 다 아는 척 작품을 인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범죄에 가깝다.

첫 번째 글은, 적어도 앞부분은 충분히 이해할만 하다. 작가와 작품과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와 같다. 당연히 작가는 작품에 대한 보호본능을 품고 있고 작품이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심각한 주제 의식을 품고 공들여 쓴 글이 이런 패러디의 대상이 되면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http://youtu.be/eMHOzB9UDS0)

SNL 코리아의 패러디는 그 중 가장 무난한 수준이다. 최근 트위터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야기가 하나 있으니, 그건 술자리에서 취하면 여자들에게 "니가 내 은교할래?"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모 문인에 대한 소문이었다.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박범신이 만들어냈던 은교의 이름과 이미지는 작가가 그어 놓은 상상력의 울타리를 벗어난 지 오래이며 그 중 상당수는 부정적이다. 당연히 화가 나겠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개인적 한탄이다. 하지만 '영화탓일까.'부터는 동의하기가 어려워진다.

박범신은 '영화만을 보고 원작을 안다고 느끼는 무지한 착각'과 '영화도 보지 않고 다 아는 척 작품을 인용하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불만을 품어야 할 문제일까? 영화만 본 사람들, 영화도 안 본 사람들이 작품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인용한다는 건 오히려 그 작품이 성공했다는 증거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와 피케티를 읽지도 않고 그들을 인용하며 그들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원래 작품의 명성이란 책을 읽지도, 각색한 영화를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책이 만들어진 뒤로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정지우의 영화 <은교>는 그렇게까지 원작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사람들이 패러디하고 놀려대는 큰 덩어리 자체는 원래부터 원작 안에서 존재한다. 달라진 게 있다면 시각적 레퍼런스가 주어졌고 작가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애독자 서클 바깥의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소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원작자가 영화화를 허락한 이유가 아닌가? 오로지 작품이 소설로만 받아들여지고 읽는 사람만 읽는 책으로 남아야 한다고 작가가 믿었다면 영화화 자체를 거부했어야 맞다.

'은교의 천박한 이미지'에 대한 잘못을 영화에게만 돌리는 비난이 거슬리는 진짜 이유는 정지우의 영화가 결코 나쁘거나 천박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 <은교>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 <은교>도 어느 의미로건 완벽한 걸작은 될 수 없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은 영화이다. 아마 지금까지 나온 박범신 각색물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일 것이고 앞으로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여러분은 <은교> 이전에 만들어진 박범신 영화를 몇 편이나 보았고 기억하는가?



소설과 영화는 상호보완적이다. 영화는 소설의 서술형식이 주는 재미 대부분을 날려버렸고 주인공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의 캐릭터는 위축되었다. 하지만 영화 속 은교의 묘사는 소설보다 몇백배는 더 좋다. 문학소녀가 아닌 은교 또래의 아이들에게 박범신의 소설을 읽어주어보라. 다들 자지러질 것이다. 박범신이 상상한 은교는 어설픈 '요새 아이 흉내'를 뒤집어 쓴 나이 든 남성 작가의 판타지에 불과하며 어떤 실체감도 무게도 없다. 나보코프의 롤리타도 그렇지 않냐고 하지 마시라. 롤리타에 대한 나보코프의 묘사는 얄팍하고 편향되어 있지만, 독자들은 거기까지가 화자인 험버트 험버트의 한계이고 그의 시야 너머에 그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돌로레스 헤이즈라는 실제 여성이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하지만 <은교>를 읽으면서 같은 생각이 드나? 영화는 김고은이라는 진짜 육체를 가진 배우를 등장시키면서 그 문제를 해결한다. 영화 속 은교도 박범신의 생기없는 묘사를 따라가지만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숨쉬는 젊은 여성으로서의 은교를 본다. 이건 엄청난 장점이다.

박범신이 영화의 단점이거나 결점이라고 생각하는 것 사실 대부분 장점이다. 그가 깊은 슬픔으로 <은교>를 썼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책의 이야기와 캐릭터를 보고 웃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이적요의 늙은 몸과 젊은 여자아이에 대한 그의 욕망을 보고 웃는다. 그건 정상적인 일이고 이적요의 진짜 비극이기도 하다. 원작 소설에서 가장 경박한 부분은 이적요의 욕망이 아니었다. 진짜로 경박했던 건 딱 박범신 정도의 현실적인 작가임이 분명한 화자(그 자체는 전혀 나쁜 게 아니다)를 시, 순수문학, 장르소설 등 모든 영역에서 종횡무진하는 완벽한 문학적 슈퍼맨으로 만들어놓고 그의 모든 욕망을 형이상학으로 완벽하게 탈색하고 은폐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정지우의 영화는 이적요의 그 제스처 너머를 본다. 당연히 이 태도가 훨씬 성숙하다.

한 바퀴 빙 돌았는데, 이렇게 생각을 전개하다보니 <은교>라는 소설의 제목이 천박하게 인용되고 사용되는 것이 과연 나쁜 일인지 의심하게 된다. 종종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다. 대중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천박하고 저질스러운 현상을 설명하는 이름을 <은교>라는 소설에서 찾았다면 그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부모로서 작가는 여전히 맘에 안 들겠지만 부모 뜻대로 자라는 자식들이 얼마나 되던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은교>스틸컷,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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