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의 거리’에 흠뻑 빠져들었던 당신이라면

[엔터미디어=김교석의 어쩌다 네가] 유나(김옥빈)는 마지막 회에서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걸으며 “이 동네 이 골목 걸을 날도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대로 50부작 드라마 <유나의 거리>와 작별하는 마음이란 정들었던 동네를 떠나는 날의 기분과 같다. <유나의 거리>는 더 이상 드라마로는 느낄 수 없을 줄 알았던 따스함과 사람 냄새로 다가왔기에 보통의 드라마가 끝났을 때 느끼는 허전함과는 종류가 다르고 증세가 깊다. 드라마 속 동네와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니 실제로 그들과 헤어진 것 같은 기분이 밀려온다.

치매에 걸린 도끼(정종준) 할아버지는 요양원으로 떠나는 길에 발을 멈추고 노년을 보냈던 집 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요양원에 할아버지를 모셔놓고 돌아온 창만(이희준)은 주인을 떠나보낸 빈방에 앉아 잠시 시간들을 기념한다. 정들었던 무언가와 헤어지기, 이제 끝이라는 것을 알고 추억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이 있다. 그래서인지 도끼 할아버지의 치매 에피소드는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건넨 작별인사 겸 악수 같았다. 물론, 눈물로 안녕을 고하진 않는다. 유나(김옥빈)와 창만의 달달한 멜로는 미소를 짓게 하고 마지막회에야 비로소 전 재산이 개 한 마리뿐인 계팔(조희봉)과 꽃뱀 미선(서유정) 사이에도 사랑이 싹텄으니 등장인물 전원이 행복을 찾은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유나의 거리>는 각종 범죄자와 사회 주변부 인물들을 다루고, 고즈넉한 한옥이 있는 북촌과 마포구 일대의 우리네 일상을 화면 안에 담았다. 그리고 뻔한 드라마 캐릭터를 지우고 ‘사람’을 넣었다. 인물을 선악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창만 정도를 제외하면 극적인 캐릭터나 평면적인 인물도 없다. 조연에게도 각자 삶의 이유와 사연을 담은 에피소드를 첨부해 모든 등장인물의 행동과 현재에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를 테면 세입자가 죽어나가자 월세 못 받았다며 열 받아 하던 전직 조폭(이문식)은 또 다른 면에서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남의 돈을 훔치는 소매치기들도 각자의 신념과 사연이 있고, 미선이 꽃뱀이 된 데에도 아픈 가정사가 있다. 행동이 비록 옳지 못하더라도 이해는 되는 ‘사람’이 드라마에 등장한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현실을 담은 혹은 현실을 닮은 드라마라고 평한다.

그러나 <유나의 거리>는 사실 동화다. 현실감각을 잘 살려서 그렇지 고아인 창만과 소매치기인 유나가 힘들어도 착하게 살다보니 하늘에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고 그 줄을 붙잡고 모두가 행복해졌다는 동화의 서사다. 서로 대면하던 시궁창 인생들을 끈끈한 대안가족으로 엮은 창만은 거의 종교지도자급 인물이다. 이러한 간단한 서사구조 위에 사람에 대한 희망이라는 건전하고도 지당한 메시지를 심었다. 막장이거나 연애를 잘하거나 장르적 성취에 탐닉하는 이때 스토리 속에 메시지를 담고 끊임없이 전하려는 드라마를 2014년에 만날 줄 몰랐다. 그러나 이 메시지의 부각은 극의 갈등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반부에 힘이 빠진 이유이기도 하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픈 마음이 있어서인지 <서울의 달>과 같은 어두운 결말은 피하다보니 긴장감이나 현실의 반영보단 따뜻한 신데렐라 스토리로 마무리됐다.



당연히 막장의 시대에 먹힐 리 없었다. 5분 단위로 갈등과 분노가 폭발하고 상식은 전복되며 그 모든 것이 우연과 악연으로 점철되는 드라마, 모든 등장인물이 서로에게 패악을 부려야 하는 로열럼블 같은 세계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드라마다. 막장 드라마가 서로가 서로와 기이한 운명으로 맺어져 상처를 주고받는다면, 유나가 사는 동네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행복을 찾는다. 이 삭막하고 차가운 거리는 창만이 가져온 에너지로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따스하게 물드는 데 이 거리를 함께 배회한 시청자들이 분노와 고성과 암투가 오가는 드라마보다 적다는 게 여전히 아쉽다.

스코어가 아쉽긴 하지만 이 따스함은 <유나의 거리>가 올해 최고의 드라마라고 여기는 이유다. 모든 캐릭터가 사람처럼 움직이는데, 결국 그 세상은 동화로 아름답게 끝난다. 현실은 퍽퍽하지만 그래도 살아갈 만하다는 위안을 이보다 더 세련되게 보여준 적도 그리고 우리자신과 주변에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다가온 드라마는 없었다. 그래서 <유나의 거리>에 빠져든 사람들은 드라마의 스토리에 매혹된 것이 아니고 등장인물들이 쌓아가는 정에 매료됐다. 그 정을 더 느껴보고 싶고 더 다가가고 싶었던 것이다.

<미생>과 같은 삭막한 세상에서 기대고픈 공동체. 프로필로만 놓고 보면 진짜 막장 중의 막장인 사람들의 집합이지만 이들이 대안가족을 이루면서 보여주는 이야기들에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 이 조직에는 김수현 작가식의 가족의 미덕, 그러니까 꼿꼿한 가장과 그 휘하에 세대들이 수직적으로 자리를 잡는 것과 달리, 어른이라고 나은 것도 없고 젊은이라고 사고치고 다니지 않는다. 처음엔 이기적이기만 하고 서로를 무시하는 것 같았지만 알고 보니 그 마음 한편에 서로가 서로에게 꺼내주지 못한 따스함 한 조각이 묻어 있는 것이다. 함께하고 싶고, 어울리고 싶은 이웃과 가족이란 세상에 필요한 가치에 대한 재조명이다. 사람과 삶에 대해 냉소가 아닌 애정을 재밌고 유쾌하게 보낸다.



이 드라마의 작가가 <서울의 달>이 수식어이자 꼬리표처럼 붙는 김운경 작가라는 점에서 반갑고 놀랍다.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한발 더 사람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중년 작가의 집념과 ‘발전’이 흥미로웠다. 코미디는 물론이고, 공무원 연금법 개혁 등 최신 시사와 젊은 세대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동시에 무려 소매치기라는 구시대적 인물군과 옛 동네를 통해 <유나의 거리>라는 세계를 창조했다. 이는 현실을 담아냈다는 표현보다 정교한 미니어처처럼 현실을 묘사하고, 그 속에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조각해냈다. 앞서 말했듯 이 모든 건 메시지를 위한 조각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모든 사람이 보금자리를 찾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다시 한번 허전함을 느낀다. 실제 극중 등장인물들이 복달거리며 함께 살았던 집을 하나둘 떠나간 것처럼, 헤어짐이란 세상사의 당연한 이치이고, 솔직히 철마다 찾아오는 드라마 한 편의 종영일 뿐이지만 유나와 그 이웃들이 살던 거리는 내 이웃이었으면, 내 가족이었으면, 내가 거기 있었으면 싶은 가상공간이었다. 이 드라마에 빠져들었던, 그리고 이런 드라마를 2014년에 만날 수 있었다는 데 감격했다. 그 세계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니 슬프지만 이제 늘 찌그러져 살아야 할 팔자인줄만 알았던 계팔이와 같은 인생역전을 꿈꿔본다.

칼럼니스트 김교석 mcwivern@naver.com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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