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원작을 섬세하게 가공한 드라마의 미덕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한파가 한창인 요즘 샐러리맨들의 시린 가슴에 뜨듯한 국물 한 그릇 전해주는 드라마가 있으니 바로 tvN의 특별기획 금토드라마 <미생>이다.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원작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러브라인이나 자극적인 사건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웹툰에서 주는 바둑 한 수를 둘 때의 적막한 긴장감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도 아니다. 하긴 웹툰의 그 차분한 전개가 화면에 똑같이 옮겨진들 마우스 휠로 스크롤을 내릴 수 있는 공간 아닌 재빠르고 정신없이 화면이 돌아가는 TV 속에서 그 특유의 차분한 긴장감이 살아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기에 웹툰을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은 만만치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웹툰이 아니더라도 원작이 있는 텍스트를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 자체가 쉽지 않다. 원작에 치중하면 드라마의 색이 극도로 옅어지면서 긴장감마저 떨어진다. 반면 드라마의 특성에 맞춘 과도한 각색은 원작을 사랑하는 이들의 원성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수많은 채널의 드라마들과 변별점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그런 작품으로 잊히기 십상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외국 드라마나, 소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들이 상당수 제작됐다. 하지만 시청률이나 평가 면에서 좋은 선례를 남긴 작품은 손에 꼽는다. 대부분은 원작과 각색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무덤으로 들어가 버린 경우가 많다. 안타깝게도 가장 최근의 예로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하는 KBS 월화드라마 <내일도 칸타빌레>를 들 수 있겠다.

반면 <미생>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중 성공작,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선례로 손꼽힐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이것은 단순히 원작인 웹툰 <미생>이 뛰어난 수작이라서만은 아니다. <미생>의 제작진이 원작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웹툰과 드라마의 특성에 대한 차이를 고려하면서 작품을 가공한 부분 또한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드라마 <미생>은 원작 웹툰이 주는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의 흐름을 최대한 친절하게 화면으로 옮겨놓는 편이다. 장그래(임시완)의 차분한 목소리에 실린 관조적이면서 의미 있는 독백들은 웹툰에서 주는 그 울림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몇몇 인물들, 김동식 대리(김대명)과 한석률(변요한) 같은 인물들은 그대로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 생생하다.



하지만 원작을 살리면서도 만화와 영상의 충돌을 고려해 신경을 쓴 흔적이 드라마에서 종종 눈에 뜨이곤 한다. 그런 제작진의 섬세한 작업이 잘 드러난 회차는 착한 남자지만 모두의 호구인 IT팀 박대리(최귀화)가 장그래의 도움으로 인생의 절정 같은 하루를 맞는 회차였다.

이 회차는 방영 전에 원작을 사랑하는 이들의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주는 에피소드였다. 웹툰에서는 자신의 업무에 회의를 가진 박대리가 장그래의 도움으로 자신감을 되찾을 때 하얀 날개가 등 뒤에서 활짝 펴진다. 이 만화에서나 허용될 법한 장면을 선택할지 포기할지 팬들은 미리부터 궁금해 하고 걱정했을 터다. 그리고 드라마 <미생>은 원작 웹툰과 똑같이 반짝반짝 빛나는 날개를 허용한다.

드라마 <미생>에서도 박대리의 날개는 만화처럼 반짝반짝 훤하게 펼쳐지는 것은 물론, 마지막 간부들 앞에서 자신 때문에 비리가 드러난 거래처를 옹호하며 자기 자신을 비난한 뒤 날개가 다 떨어져나가고 벌거벗은 뒷모습이 드러나는 것까지 똑같다. 이 만화 같은 장면들은 우려와는 달리 급작스럽지만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건 이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박대리의 팍팍하고 답답한 삶의 모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만화 같은 장면에서 픽 웃음이 터지면서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가 동시에 느껴지는 것이다.



이처럼 원작을 섬세하게 살리는 부분이 큰 축을 맡는 동시에 <미생>은 원작의 특성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웹툰을 드라마에 어울리게끔 가공한다. 이런 방식은 주로 <미생>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오상식 과장(이성민)과 주연은 아니지만 웹툰에서 주인공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안영이(강소라)를 통해 드러난다.

안영이는 웹툰 <미생>에서 살아 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수많은 부연설명들을 위해 설정된 존재처럼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 또한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드라마 <미생>에서의 안영이는 완벽한 회사원이란 설정은 똑같지만 다른 신입사원들처럼 회사 내에서의 자잘한 갈등 때문에, 그것도 여성이라는 면 때문에 더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부분이 도드라진다. 이 상황들을 이겨나가는 강인한 부분이 배우 강소라의 당찬 이미지와 어울리면서 안영이는 웹툰에서보다 훨씬 생동감 있는 인물로 변주된다.

하지만 <미생> 캐스팅의 신의 한수는 바로 오과장 역의 이성민이 아닐까한다. 원작 <웹툰>에서의 빨간 눈 오과장은 답답하고 찌들었지만 인간미를 잃지 않은 정의로운 인물이다. 드라마의 오과장은 이 찌든 면을 세탁하진 않지만 거기에 이성민 연기 특유의 다부지고 요란하고 격정적인 스타일이 가미된다. 그 덕에 다소 느릿하게 처질 법한 드라마 <미생>의 분위기에 적절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무엇보다 이성민의 오과장 덕에 웹툰의 그림만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샐러리맨의 애환이 가득한 술자리가 제대로 그려진다. 오과장이 침을 흘리고, 갈지자로 거리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와 물통을 입에 대고 물에 마시는 장면을 볼 때마다 그렇다.

“술 좀 안 마시고 다닐 수 없어?”

아내의 짜증 섞인 한 마디에 오과장은 혀 꼬인 목소리로 한 마디 한다.

“없어. 맛있으니까.”

잠시 후 아내에게 한 마디 더 한다.

“당신이 술맛을 알아?”

고개를 쳐든 오과장은 카메라를 향해, 아니 TV 바깥에 있는 수많은 갑과 을들, 아니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다소 쓸쓸하게 말한다.

“당신들이 술맛을 알아? 아냐고.”

이 짧은 대사에는 먹먹한 울림 같은 것이 있다. 그건 좋은 원작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섬세하게 가공한 드라마 <미생>이 TV 밖의 사람들과 공명하는 따뜻한 울림이기도하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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