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를 다룬 ‘카트’의 가장 중요한 미덕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노동자 역에 진짜 노동자를 쓸 수 있는데 왜 굳이 배우를 쓰는가?”라고 <전함 포촘킨>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체인이 말했다고 한다. 그는 “30살의 연기자에게 60살의 노인 연기를 맡기면 그는 수일 혹은 수십시간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이미 60년간 연기해오지 않았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건 무척 매혹적으로 들리는 말이라 쉽게 모든 영화와 배우에게로 일반화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자신의 작업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말자.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집단을 다루고 개성적이거나 깊이있는 캐릭터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무성영화이며 감독의 스타일이 연기를 누른다. 이런 영화에서 비전문배우를 쓰는 것은 크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반 대제> 시리즈와 같은 후기 토키 사극에서도 비전문배우를 썼던 건 아니다.

에이젠슈체인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에서 비전문배우들이 밀도높은 연기를 보여주는 경우는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부분 아역배우들은 비전문배우와 같은 핸디캡을 안고 있다. 보다 정통적인 예로는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에서 아버지로 나왔던 실제 실업자였던 람베르토 마지오라니가 있다. 그가 <자전거 도둑>에서 보여주었던 명연기는 좋은 감독이 비전문가의 실제 경험과 감정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자전거 도둑>과 관련된 호러 스토리 중 하나는 데이빗 O. 셀즈닉이 아버지 역으로 케리 그랜트를 캐스팅한다는 조건으로 투자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데 시카는 이를 거부했고 이는 올바른 선택이었다. 도회적이고 우아한 캐리 그랜트는 전후 이탈리아 실업자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할리우드에 그런 배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헨리 폰다와 같은 배우들은 어땠을까. 지금의 <자전거 도둑>이 가진 생생한 사실주의는 잃었겠지만 오로지 대중이 잘 알고 있는 스타 전문 연기자만이 가능한 무언가 다른 것을 얻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슬슬 부지영의 <카트> 이야기를 해보자. 2007년 홈에버 파업을 소재로 삼은 대형 마트 계약 노동자 파업 영화이다. 우린 이런 영화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서는 텔레비전이나 영화관에서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대형스타는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그 가상의 영화는 극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순수주의자들은 극적 효과가 실제 사건을 왜곡하는 극영화를 거부하고 오로지 다큐멘터리만 인정할 수도 있다.

다큐멘터리는 제외하기로 하고, 극영화만 이야기해보자. 위에 언급한 가상의 영화는 만들어질 가능성이 거의 없다. <카트>는 의외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영화이다.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대형마트 세트를 통째로 지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CG도 상당히 많다. 투자자를 모으고 홍보를 하려면 당연히 이름과 얼굴이 알려진 배우들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단지 이것을 '차선책'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문배우들에게는 전문배우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스타들에게도 무명의 일반배우가 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 차선책이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는 또다른 길인 것이다.



<카트>의 큰 미덕 중 하나는 바로 배우의 활용에 있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염정아, 김영애, 문정희처럼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로 친숙한 배우들이 있고, 천우희, 지우와 같이 떠오르는 신인들도 있고, 도경수와 같은 아이돌도 있으며, 황정민, 김희원과 같은 중견 조연배우들도 있다. 이들은 모두 조금씩 연기 스타일과 경력이 다르며 심지어 정치성향도 다르다.

쉽게 만든 영화에서라면 몰입을 방해할 이러한 차이점이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된다. 얼핏 보면 화려한 이미지의 염정아는 캐리 그랜트를 <자전거 도둑>에 캐스팅하는 것처럼 실수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이미지의 차이가 오히려 장점이 된다. 노동자 파업에 쉽게 뛰어들 수 없을 거 같은 이질적인 배우를 투입하자 그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갈등과 그로 인한 서스펜스가 배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김영애나 김강우와 같은 경우는 그 배우의 기존 이미지를 100퍼센트 활용한다. 어느 쪽이건 관객들이 이들의 기존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하게 이용되는 다양한 스타일의 이러한 연기가 영화 속에서 제대로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이들의 연기는 영화제 연기상 리스트에 오를만한 종류는 아니다. 그건 그들에게 그런 연기를 할 능력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이들 중 몇 명은 이미 다른 영화의 연기로 상을 받고 있는 중이다) 적당한 연기로만 만족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하는 연기는 배우의 에고를 만족시키는 단독의 '명연기'가 아니라 수십 명이 넘어가는 다양한 동료들과 함께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는 또다른 종류의 연기이다. 노동자의 연대를 다룬 영화에서 이것만큼 중요한 미덕이 어디 있을까.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카트>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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