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정다훈의 문화스코어] 오페라는 베르디 오페라, 푸치니 오페라 등 작곡가의 이름과 함께 불린다. 오페라는 무엇보다 음악이 중요하다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작용해 작가 혹은 대본가의 이름은 음악 애호가들 외에는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창작오페라 <달이 물로 걸어오듯>(작가 고연옥, 작곡 최우정, 연출 사이토 리에코, 지휘 윤호근)은 누구의 오페라로 불러야 할까?

극과 음이 혼연일체가 돼 누구 한명 이름을 앞에 놓기 힘들었다. 오히려 “연극과 음악이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의 몸과 합쳐져 ‘새롭게 생각하는 오페라’를 탄생시켰다”고 말하는 편이 적절할 듯 하다. 제대로 된 연극 한 편을 본 듯한 묵직한 감동, 오페라 한 편을 감상한 듯한 음악적 충만감을 한 번에 느낄 수 있었던 무대랄까.

‘신데렐라 콤플렉스 핏빛 버전’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아내와 함께 아내의 의붓어머니와 딸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던 한 남자의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구상된 것. 나이 오십이 넘도록 혼자 살다 술집 여종업원 경자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한 수남이 살인죄로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극이 시작된다.

극을 시작하고 닫는 수남은 내내 ‘생각을 해보자’라는 말을 한다. 오페라는 사랑하는 여인이자, 자신의 아이를 뱃속에 품고 있는 아내 ‘경자’와 관련된 기억을 하나 하나 소환하는 과정에서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수남의 혼란스런 의식에 초점을 맞췄다.

수남의 내면을 통해 작가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과 생각’, ‘사람 마음이란 어떻게 변해 가는가’, ‘반쪽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고독함’, 더 나아가 수남을 왕자로 여긴 채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경자’라는 인물을 통해 ‘운명과 구원의 문제’로 까지 주제를 확장시키며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진다.

최우정의 음악은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바보각시’,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등을 통해 이미 느꼈듯 천천히 하지만 뜨겁고 강렬하게 가슴을 관통한다. 이번 작품에서 음악적으로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 장면은 6장의 다양한 음악 안에 메시지를 담아 낸 활기 넘치는 술집 장면, 7장의 화물차 운전수 수남의 노래, 11장 경자가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지 알 수 있게 과거사를 이야기 하는 장면 이었다. 또한 3/4박자로 흐르는 경자의 왈츠는 다양하게 변주되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극 곳곳에 스며들어있었다.

수남(베이스 바리톤 김재섭), 경자(소프라노 정혜욱) 두 명의 주인공 외에 복선과 단서를 적절히 암시하며, 극을 밀도감 있게 받쳐주는 인물은 인생에 대한 씁쓸한 지침을 들려주는 술집 마담(메조소프라노 김지선), 우리 안의 수 많은 ‘신데렐라’를 상징하는 경자와 함께 일하는 술집 아가씨 미나(소프라노 윤성회),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검사(테너 엄성화) 외에 테너 최보한, 바리톤 이혁, 베이스 바리톤 이두영이다.



무대 디자이너 박상봉은 새하얀 의자와 탁자들, 무대 정면에 자리한 커다란 거울 등 만으로 서로의 생각이 끝내 만나지 못하는 슬픈 운명의 두 남녀의 내면을 형상화시켰다. 조명디자이너 조인곤의 손길 역시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수남의 머릿 속처럼 ‘찌지직’ 거리는 먹통의 TV화면, 경자의 꿈쩍하지 않는 어둠과 과거사를 상징하듯 무대 바닥에 커다란 굴처럼 자리한 장롱 역시 효과적으로 작품의 내용과 맞물리며 빛을 발했다.

이번 작품의 연출을 맡은 사이토 리에코는 연극 <달이 물로 걸어오듯> 일본 공연 때 연출을 맡은 이다. 사이토 리에코는 불완전한 인간의 불안한 내면에 초점을 맞춘 21세기적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사이토 리에코 연출과, 윤호근 지휘자 모두 입을 모아 “이번 작품은 ‘생각’이라는 거대한 테마를 일상과 밀접하게 그렸음”을 밝혔다.

작품 안에선 남자와 여자는 ‘달이 물로 걸어오듯’ 만나고, 아무도 모르게 달이 물로 걸어오듯, 모든 걸 저절로 알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늘과 땅처럼 먼 거리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남녀의 사랑, 고단한 인생을 버티기 위해 또 다른 외로운 인생에게 기대는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 내 마음도 모르면서 남의 마음만을 알고자 했던 또 다른 이기심, 이유와 목적이 있는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일 등이 연출가와 지휘자의 손길을 거쳐 디테일하게 펼쳐졌다. 그 안에서 관객들은 ‘생각거리’를 가슴에 안고 돌아갈 수 있었다.

작은 오케스트라 '챔버 피니'(Chamber Pini)를 이끈 지휘자 윤호근은 최우정의 음악에 날개를 달아주고, 성악가들의 다채로운 보이스를 본질로 끌고 와 집중력을 배가시켰다. 소프라노 정혜욱은 단순히 나쁜 여자만이 아닌 ‘생각을 하면서 살아남고저 했던’ 경자의 내면을 관객들이 함께 돌아볼 수 있게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려냈다. 단순히 경자가 수남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만이 아닌, 수남 역시 사랑한다고 말만 할 뿐 경자의 보이지 않는 마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효과적으로 터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이스 바리톤 김재섭은 차가운 도시에서 상대의 그림자만 안고 살아가는 고독한 중년의 모습을 공감 있게 그렸다.

좋은 작품임이 분명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11장에서 생각을 멈춘 경자가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만 남았다고 노래하자, 경자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겨우 옛날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 라고 말을 건네는 수남의 각기 다른 감정선의 갈림길을 따라가고 있던 찰나 그 뒤에 펼쳐지는 장면이 다소 긴장감이 떨어진 점이다.

만날 듯 만나지지 않는 두 남녀, 허공을 떠도는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비극적인 남녀의 시각으로 보면 납득이 되기도 하지만 눈물 대신 젖을 흘린 경자에 대해 채근하는 수남의 대사가 반복적으로 길게 나와 상투적으로 흐른 점이 여운미를 감소시켰다. 한 가지 더, 대단히 빠른 템포로 쏟아내는 제 9장 국선변호사의 파를란도 장면 또한 음악적 의미도 불분명하고 극 안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다.



지난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무대에 오른 <달이 물로 걸어오듯>은 서울시오페라단이 2012년 좋은 창작 오페라 개발을 위해 결성한 예술가들의 모임 '세종 카메라타'에서 만난 작가 고연옥과 작곡가 최우정이 2년간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이다.

이건용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은 "오페라는 음과 말이 부딪히는 것이기에, 카메라타를 통해 작곡가는 말을 배우고 극작가는 음을 익혀 더욱 견고한 오페라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음악 자체가 말을 할 수 있어야 함”을 피력한 최우정 작곡가는 “고저장단을 음악으로 잘 살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며 “언어학자 이현복 선생이 쓴 <한국어 표준발음사전>을 참고하면서 이번 오페라를 작곡했다. 특히 자음 연습이 잘 될 수 있게 신경 썼다” 고 밝혔다.

“오페라는 가장 아름다운 연극” 임을 믿는 고연옥 작가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음악이야말로 말로 할 수 없는 것,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서울시오페라단 <달이 물로 걸어오듯>이 젖먹이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듯, 무럭 무럭 자라 다시 한번 관객들 앞에 선 보일 날을 기대한다.

공연전문기자 정다훈 ekgns44@naver.com

[사진=서울시오페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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