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영화판을 몽땅 여성들이 장악한다고 해도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최근 씨네코드 선재에서 열린 2014년 여성영화인 축제에 참석한 배우 문소리는 자신이 연기해야 했던 몇몇 캐릭터들에 대해 비판했다. 기사의 인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많은 남자 감독들과 작업할 때 그들의 판타지를 구현해야 하는 미션을 받을 때가 있다. 판타지는 판타지일 뿐 내가 구현하고자 하는 캐릭터는 내가 느껴야 하는 사람인데 그것과 거리가 멀어서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자 하는 의무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캐릭터가 온전한 사람으로서 발 딛고 서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지당한 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실린 기사를 읽으면서 거의 기계적인 반문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생각해보라. 지금 소위 '한류 스타'로 날리는 남자 배우들은 거의 전적으로 여성작가들이 만든 여성 판타지를 연기한다. 캐릭터 이해는커녕 연기하며 오그라든 손발을 펴느라 바쁠 것이다. 그 고생이 설마 문소리의 것만 못할까.

사실 이런 일대일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이게 가능하려면 양성 관계가 1대1의 거울상 대칭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그렇지가 않다. 위의 예를 보아도 그렇다. 남성 판타지를 따른 여성 캐릭터는 수동적이 되어 남자 주인공의 욕망과 원한이나 한없이 받아주어야 하겠지만, 여성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남자 캐릭터들은 여전히 주도적이고 극중 위치도 높다. 남자배우들이 오글오글함을 참아서 얻을 수 있는 게 여자배우들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일단 한류 스타 자리에 오르면 작업 중 얻은 오글오글함을 치료할 상담비도 얼마든지 낼 수 있을 것이다.

질문 하나를 더 던져 보자. 텔레비전 연속극의 키를 여성 작가가 쥐고 있다면 여자 배우들을 만족시킬만한 캐릭터는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대한 답은 당연히 부정적이다. 오글오글 한류 스타 남성 배우가 여성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대부분 분명한 자기 개성을 가지기 보다는 여성 시청자들의 신경을 많이 거스르지 않은 채 대리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비개성적인 몇몇 틀 안에 수렴되는 경우가 많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소위 '캔디' 캐릭터로 불리는 유형이다.

이것이 정상이거나 늘 일어나는 일인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그레타 가르보, 베티 데이비스, 마를레네 디트리히, 캐서린 헵번과 같은 쟁쟁한 여성 배우들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건 여성관객들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무시할 수 없는 여성팬들을 갖고 있었고 여성 관객을 대상으로 한 영화에 출연했다. 비슷한 이유로 지금 많은 남성 관객들이 남성위주의 영화를 자연스럽게 소비한다. 무게 있는 여성 캐릭터의 부족을 단순히 주도 관객인 여성의 이성애 경향으로 설명하는 건 큰 의미가 없다. 정상적인 상황의 경우, 스타 배우들에게 동성팬이 부족하다는 건 오히려 위험신호로 간주된다.

이는 이야기를 키를 쥐고 있는 쪽이 여성이냐, 남성이냐로 계산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드라마이건, 영화이건, 소설이건, 이들이 잠재적 여성 고객이 흥미로운 행동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상상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이야기꾼의 직업을 몽땅 여성들이 장악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고객에 대한 선입견과 그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이 꼬리를 물며 지루한 양의 되먹임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건 단순히 영화나 드라마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를 재미있고 가치있는 무언가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건 우리의 사회가 균형을 잃고 미끄러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균형을 회복하려는 의지도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그 가상 고객의 독재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 시청자나 관객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는지 모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미지의 영역을 대신 탐험하고 발견하는 것이 이야기꾼의 역할이다. 이야기꾼은 고객의 요구를 따르는 대신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언제나 말로 하는 것보다 어렵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스파이>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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