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의 ‘땅콩리턴’, 임성한 작가가 만들었다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아마 <인어아가씨>와 <오로라공주>를 쓴 임성한 작가도 하늘에 떴던 여객기가 되돌아가는 규모의 막장 장면은 꿈도 못 꾸지 않았을까? <아내의 유혹>에서 신애리(김서형)를, <왔다, 장보리>에서 연민정(이유리)을 배출한 김순옥 작가도 이런 포스의 악녀 캐릭터를 그려내긴 힘들지 않았을까?

대한항공의 ‘땅콩리턴’, 사회 상류층이 사건의 중심이니 좀 더 럭셔리하게 ‘마카다미아리턴’이라 부를 법한 이 뉴스는 현실 막장 드라마의 완결판 같은 인상이다. 아니, 오히려 막장드라마가 넘볼 수 없는 경지의 스펙터클 막장을 그려낸다. 그 시작은 견과류로 미약하나 그 결과는 여객기를 되돌리는 규모라니.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 현실의 막장을 드라마의 막장으로 한번 치환해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임성한 작가의 가상 신작 <활주로 공주>에 이런 대사와 장면이 등장했다고 생각해 보자. 등장인물은 모 항공사의 맏딸이자 노처녀인 황달기(김보연 혹은 박해미)와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승무원 하늘아(언제나 그렇듯 얼굴이 잘 안 알려진 신인급 여배우)다.

“지금 이 견과류 주는 방법이 뭐가 잘못 됐는지 모르겠다는 거야?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아니지 그 순진하게 생긴 얼굴로 영리하게 머리 굴려 넘어가 보겠다고 수 쓰는 거야?”

승무원 하늘아는 눈물이 터지려 하지만 이를 앙다물고 고개를 빳빳이 든다.

“저는 견과류를 드시겠냐고 물었고 원하셔서 견과류를 가지고 온 게 전부입니다. 땅콩을 달라 하셨는데 마카다미아를 드린 게 아니고요. 마카다미아를 달라고 하셔서 마카다미아를 가져왔고요.”

헛웃음 살짝 치고 황달기는 하늘아를 바라본다.

“승무원님이 잘못 한 거 없어? 어떻게 두 눈 똑바로 뜨고 VVIP에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해. 잘못이 없어도 VVIP의 눈에 잘못으로 보이면 잘못인 게 법인 거 몰라, 이 안에선. 아니면 어차피 이판사판이다, 그러니까 까불기라도 해 보자 뭐 이런 심보인 거야? 이코노미에서 비즈니스로 넘어오면 서비스정신도 같은 품격으로 넘어와야지. 이코노미 서비스, 비즈니스 서비스 그게 다르지 같아? 달라도 보통 달라, 어디. 사과주스하고 오렌지주스 차이야? 아님, 한식하고 양식 차이야? 하늘하고 땅 차인 거야. 아직도 내 말 이해가 안 가? 그럼, 유니폼만 이 항공사의 스튜어디스지 그냥 관광버스 안내원하고 뭐가 달라. 아니, 어떻게 이코노미석과 똑같이 견과류를 봉지채로 내 올 수가 있어? 그렇게 교육 받은 거야? 아니지, 교육은 제대로 했을 텐데 제대로 이해 못한 사람 잘못이지. 하지만 나 더는 불쾌해서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리고 너 같은 승무원 이 비행기에 탈 자격 더는 없어.”



하늘아 여전히 눈물을 참는다.

“이미 여객기 출발했습니다.”

“출발? 출발하면 다야. 돌려, 다시 되돌려. 지금 당장 공항으로 귀항해!”

이어 항공기가 인천공항 활주로로 되돌아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만약 이런 장면이 MBC 일일드라마 <활주로 공주>에 나왔다면 시청자들의 원성에 게시판은 미어터질 게 틀림없다. 아무리 막장이라도 한 사람이 견과류 때문에 비행기를 되돌리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정말 전무하다고 해도 해도 너무한 장면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2014년 대한민국에서 정말로 대한항공의 항공기가 견과류 때문에 공항으로 돌아온 사건과 마주했다. 현실의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연일 더 가지를 뻗어나간다. 항공사의 비겁한 변명과 다급한 사과, 이어 사건의 중심인 부사장의 사직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드라마가 현실과 다른 점은 눈 가리고 아웅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젊은 연인의 깨 볶는 장면으로 슬쩍 넘어가 방금 전의 말도 안 되는 자극적인 장면을 덮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대한항공 드라마’는 곧이어 부사장의 사직이 무늬만 사직이라는 언론의 보도가 이어졌다. 거기에 더해 이제 드라마는 일일드라마에서 그 파이가 커져 왠지 <추적자>의 박경수 작가가 쓸 법한 사회추리물로 흘러가는 분위기다. 검찰의 대한항공 압수수색 등등으로 사건이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니까.

대한항공이 의도치 않게 만든 현실 막장 드라마가 ‘꿀잼’인 건 틀림없다. 그건 우리가 알고 있던 사회 상류층의 윤리의식과 허위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는 고소한 맛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드라마 칼럼니스트로 필자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던 재벌가의 모습이나 말도 안 되는 억지상황이 현실에서 진짜 일어나는 걸 지켜보는 아이러니의 재미도 있다. 마치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처럼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 5차원의 공간에서 현실판 막장드라마를 TV로 보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5차원의 공간에 있자니 뭔가 좀 이상한 기분도 든다. 사건 이후에도 대한항공의 현실 막장 드라마의 덩치가 점점 커지는 느낌이랄까? 이 거대한 드라마로 실은 살짝 ‘생얼’을 드러냈던 추한 현실을 수첩 닫듯 슬쩍 덮어보려는 또 다른 드라마가 있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슬프게도 너무 많은 막장드라마를 본 모양이다. TV에서건 현실에서건.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YTN, 대한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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