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시장’의 선택과 집중, 그리고 천만 관객

[엔터미디어=이만수 기자] 영화 <국제시장>이 천만관객을 넘었다. 어찌 보면 예고된 결과다. 영화의 성취와 상관없이 아버지 세대에 대한 무한긍정의 헌사를 담은 영화다.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의 눈물겨운 이산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역만리 독일의 광산에서 시커먼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지옥같은 삶을 살아내는 덕수(황정민)의 이야기는 베트남 전쟁을 거쳐 모든 국민들을 눈물의 도가니로 빠뜨렸던 이산가족 찾기 이야기로 이어진다. <국제시장>은 아버지 세대의 힘겨웠던 삶을 긍정의 시선으로만 ‘선택과 집중’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가 됐다.

이렇게 한 가지의 시선으로 ‘선택과 집중’된 영화가 논란을 야기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즉 그것은 한 가지 시선의 ‘선택과 집중’이 다른 시선들을 배제시키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 세대에 대한 무한긍정’만을 선택한 영화는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과 ‘긍정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시선들’을 배제시킨다. 그러니 그들의 비판이나 논란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이고 어찌 보면 건강한 것이다.

윤제균 감독은 ‘정치적인 의도’를 없애기 위해 당대의 어두운 이야기들을 뺐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정치적인 부분을 빼버린 것이 오히려 논란을 만들어 당황스러웠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이야기는 자신은 ‘상업영화감독’일 뿐, 영화로 세상을 바꾸거나 하는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이 이야기가 모두 진심이라면 윤제균 감독은 ‘정치적인 것’이 진짜 무엇인지를 모르는 감독이거나, 알고는 있어도 오로지 영화의 가장 큰 목적은 상업적 성공이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감독일 것이다.

즉 본래 ‘선택과 집중’이 갖는 배제의 논리는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대를 다루는 경우는 특히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에서 발견하는 것이 바로 선택과 집중이 만들어내는 배제의 폭력이다. 권력을 잡은 왕의 관점을 담아내는 이런 정사에서는 왕의 치적을 찬양할 뿐,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그들로 인해 고단한 삶을 살게 된 민초들의 이야기는 철저히 배제된다. 다루지 않는다는 건 정치적인 행위다.



하지만 윤제균 감독은 본인 스스로를 ‘상업영화 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저 ‘상업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세대에 대한 무한긍정’은 당대를 살아낸 장년층이 현실에서 느껴오던 상실감을 건드린다. 그 상실감은 개발시대의 급속 성장이 IMF와 함께 거품이 빠지면서 당대의 주역들로 추앙받던 가장들이 후대에 경제적 불평등이니 양극화니 청년 실업 같은 숙제를 남긴 존재들로 추락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아버지들은 IMF 이후 한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가족 내에서도 점점 뒷방으로 밀려나는 위치에 놓이게 됐다.

<국제시장>이 건드린 건 바로 그 상실감을 되짚어 “당신은 그래도 괜찮은 삶을 살았다”는 위로다. 그 ‘괜찮은 삶’이란 현재 논쟁적인 부분일 수밖에 없지만 그 논쟁적인 면 역시 상업적으로는 전혀 나쁜 것이 아니다. 즉 이 영화는 대놓고 아버지 세대에 대한 찬양을 하는 것으로 ‘상업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것은 윤제균 감독이 지금껏 만들어온 일련의 영화들, 이를테면 그의 첫 번째 천만 영화인 <해운대>나,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같은 비교적 초기의 영화들에서도 두드러진 그의 경향이다.

상업영화에 상업적 이득을 추구하는 노력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상업적 추구를 우리는 오락거리로 생각하지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과연 <국제시장> 같은 시대를 소재로 가져오는 영화의 ‘상업적 선택’은 지지받을 일일까. 다시 말해 특정세대의 상실감을 건드려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당대의 삶을 그저 무한긍정으로만 그려낸다는 것은 과거는 찬양될지 몰라도 현재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천만 관객이 넘었다는 이야기에 벌써부터 <국제시장>에 대한 의미부여가 넘쳐난다. 김윤진은 “천만이 봤다는 건 후손들이 인정한 것”이라고 단정했고, 여러 매체들은 “천만은 보수만이 만든 것이 아니다”라거나 “오명을 벗었다”는 식으로 찬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수치에 경도된 이야기들은 ‘상업적 선택’일 뿐인 성과를 마치 현대사에 대한 무한긍정으로까지 확대시킨다. 과연 이건 합당한 일일까.

‘천만 영화’라는 지칭은 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상업적 수치에 의해 판단되는 시대의 우울을 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천만이 본 영화는 옳은 것이고 1만 명이 본 영화는 틀린 것이며 천만이 본 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것은 마치 반동처럼 판단되는 시대. 그래서 천만이 1만을 배제하는 시대는 우울하다. <국제시장>은 기획부터 제작 배급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준비된 ‘상업영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천만 영화’라는 지칭이 상업영화에 심지어 ‘국민’을 호명하는 식으로 오도시키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이만수 기자 leems@entermedia.co.kr

[사진=영화 <국제시장>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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