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미디어=백우진의 잡학시대]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 응원단은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붉은 악마는 치우(蚩尤)천왕을 상징으로 앞세운다. 치우는 중국 고대신화에 나타나는 인물로, 전투에 매우 뛰어나 황제(黃帝)와 패권을 다퉜다고 전해진다. 조선 후기 이후 치우를 우리 역사의 인물로 해석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치우가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의 명에 따라 황제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는 기록이 등장했다.

언젠가부터 단군이 건국했다는 고조선이 중국의 변방이 아닌 본류였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김운회 동양대 교수는 “고조선은 은나라의 방계국으로 주나라 초기에는 사신을 보낼 만큼 일정한 국체를 지녔으며 은나라가 망한 후 은의 유민과 결합해 더 확대된 고조선을 건설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고조선은 한반도가 아니라 베이징에서 멀지 않은 산둥반도에 터를 잡고 한(漢)과 겨룬 강국이었다. 이어 김 교수는 “고조선의 고유성은 고구려, 거란(요), 금, 청 등에 의해 계승됐다”고 주장했다. 중원을 차지한 여러 북방민족이 우리와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얘기다.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먼 역사 속에, 그리고 더 큰 비중을 가진 인물이 우리 선조라는 사실은 우리를 자랑스럽게 한다. 또 우리 선조가 세운 나라가 생각보다 훨씬 강성했다면 우리는 전보다 더 긍지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는 찬란한 문화를 인류에 남겼다.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의 역사와 선조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이탈리아 인은 그리스인 못지 않게 로마의 역사와 선조를 마음 속으로 자랑할 것이다. 스페인은 스페인 대로, 영국은 영국 대로 세계를 주름잡은 조상을 명예로 간직하고 있으리라. 우리 조상도 그리스나 로마, 스페인이나 영국처럼 한때 주변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을 건설하고 경영했다면, 그 역사적 사실은 우리에게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중요한 대목은 ‘조상이 누구고 어떤 활동을 벌였느냐’ 못지 않게 ‘과거 이민족과 다른 나라가 들려주는 교훈’이다. 훌륭한 선조를 두고도 오늘날 본받지 않는다면 그 훌륭한 선조를 욕되게 할 뿐이다. 반면 뼈아픈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당대를 잘 경영하는 나라는 역사를 잘 배우고 실천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조선과 일본이 공유한 역사에 그런 사례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완전하게 제압된 일본은 수 세기 이후 이순신 학익진의 원리를 익혀 청과 러시아 해군을 대파한다. 일본은 이순신의 역사를 잘 배워 써먹었다. 좋게 활용했는지는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반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청나라의 침입을 받고도 국방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은 이순신의 탁월한 전술은 물론이요, 전란에 대비하는 정신조차 실천하지 않았다. 두 나라의 운명은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왕과 그의 업적, 특히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자 한글은 우리의 자랑이다. 한글은 우리 문화가 세계에 퍼져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뿐 아니다. 우리가 자랑할 역사적 사실은 차고 넘친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려 우리 역사의 뿌리를, 너무 희미한 나머지 모든 주장이 가능한 영역까지 확장할 필요가 과연 있을까?

두 아이의 말싸움을 상상해보자. 부잣집 아이한테 기 죽지 않으려고 우리 애가 “옛날 13대조 할아버지 때엔 우리가 너희보다 더 잘 살았다”고 말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잣집 아이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우리와 우리 애한테 필요한 건, 우리 선조가 한때 잘 살았다면 그렇게 된 비결은 무엇이며 그 아이네 집이 오늘날 잘 사게 된 요인은 무엇인지 분석해, 앞으로 우리가 잘 사는 방법을 찾아내 실행하는 일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우리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으며, 우리 역사 가운데서도 우리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분만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치욕스러운 역사로부터도 교훈을 얻어 그런 전철을 다시 밟지 않도록 경계하고 대비해야 한다. 또 우리가 아닌 남의 역사에서도 배워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자랑할 수 있는 역사를 가진 나라는 행복하다. 더 행복한 나라는 후손이 두고두고 자랑할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나라다. 그렇게 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칼럼니스트 백우진 <이코노미스트 편집장> cobal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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