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원작 못 살린 떠들썩한 가부장제 소동극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반(反)▲.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허삼관>은 저예산 코미디물 <롤러코스터>로 감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하정우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허삼관’이란 제목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영화는 중국의 위화작가의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삼는다. 그런데 왜 ‘매혈기’라는 핵심적인 단어를 뺐을까? 영화를 보고 나면 의문이 풀린다.

원작은 중국의 40년대부터 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약 30여년에 걸친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다. 특히 역사적 희비극이라 할 만한 문화혁명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이것을 53년부터 64년까지의 한국으로 옮겨온다. 당연히 문화혁명은 등장하지 않으며, 시간은 압축된다. 물론 영화가 원작과 같아야 할 이유는 없다. 특히 “30여년의 세월을 2시간 안에 담기엔 방대했다”는 하정우 감독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원작의 문제의식을 이어가면서, 핵심적인 사건으로 축약하는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사건의 갈등해소 양상이 부족하게 그려져서 원작의 주제의식이 담기지 않는데 있다. <허삼관>이 여기에 해당된다.

◆ 친자를 둘러싼 소동극, 주제의식은 어디로

<허삼관 매혈기>의 핵심이야기는 아들이 친자가 아닌 것을 알고 내치다가 품는 과정이다. 아끼던 맏아들이 친자가 아니라는 것은 가부장적 질서에 있어서 가장 공포스러운 스캔들이다. 이 갈등의 해결방식이야말로 가부장제에 대한 태도를 가늠하는 척도이다. <허삼관 매혈기>는 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면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에 나온 <좋지 아니한가><고령화 가족> 등은 이 갈등을 차라리 심드렁하게 처리함으로써 가부장제에서 한 발 비껴 서있는 모양새를 취한다. 이는 <허삼관 매혈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이다. <허삼관 매혈기>는 친자가 아닌 아들을 내치다가 품는 과정을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는데, 그 과정이 서사의 완결성과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영화 <허삼관>은 허삼관의 심리적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며, 그 결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영화는 굿판에 보낼 때까지 친자가 아니라고 내치던 일락이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외침을 듣고, 스리슬쩍 아들로 품게 되었다고 묘사한다.



영화에는 가족외식에 따라가지 못한 일락이 집을 나와 떠돌 때, 허삼관이 음식을 사주는 장면이 없다. 그러나 원작에서는 허삼관이 일락을 업고, 간절히 원하던 국수를 사준다. 여기에서 1차적인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즉 원작에서는 하소용이 쓰러지기 전에 이미 허삼관은 일락을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굿판에서 일락이가 하소용을 아버지라 부를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아버지로 부르자, 일락을 데려오면서 식칼로 팔에 상처를 내며, 누구라도 일락을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하면 이렇게 상처를 낼 거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엄중한 선포로 일락은 허삼관의 아들로 대외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굿판의 의미를 살려내지 못한다. 심지어 “아버지 저를 데려가 주세요” 라는 말은 중의적으로 들린다. 허삼관에게 집으로 데려가 달라는 말로 들리기도 하고, 혼수상태의 하소용에게 데려가 달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영화는 곧이어 일락이가 쓰러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정말로 그의 간청이 이루어진 것 같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원작에서 일락은 22살에 간염에 걸리며, 이 일은 교통사고로 혼수상태가 된 하소용과 연결고리가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 일락은 굿판이 벌어지고 얼마 후 뇌염에 걸린 것으로 묘사되며, “하소용과 같은 병”이라는 대사까지 삽입되어 있다. 즉 신 혹은 운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일락이는 하소용의 아들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것은 원작이 넘어서고자 했던 혈연 중심의 가부장제에 여전히 영화가 이끌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원작으로부터 친자를 둘러싼 소동극만을 가져 온 채, 그 주제의식은 제대로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 유쾌한 ‘허삼관’은 있지만, 불편하게 찌르는 ‘매혈기’는 잘라먹은

일락을 자기 아들로 품는 과정 못지않게, 남의 자식을 낳은 아내에 대한 미움을 철회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원작에서 허삼관은 아내에 대한 실망이 가득할 때, 뚱보가 된 임분방과 진짜로 불륜을 저지른다. 그리고 매혈을 하여 임분방에게 잔뜩 선물을 안기고, 그로 인해 임분방의 남편에게 들키고 만다. 후일 허삼관은 문화혁명기 때 아내가 기생 혐의로 고발되어 성토회장을 끌려 다닐 때, 아내를 위해 밥을 배달해준다. 자식들이 엄마를 부끄럽게 여기자, 허삼관은 자식들 앞에서 자신의 불륜에 대해 자세히 털어놓는다. 자신도 무결한 아버지가 아님을 고백하려는 것이다.

허삼관은 자신도 불륜을 저지름으로써 마음속에서 아내에 대한 미움을 털어낸 셈인데, 이 같은 반성이나 용서는 영화에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는 임분방과의 불륜을 불분명하게 묘사하며, 임분방의 남편이 허삼관의 집에 와서 폭로를 할 때, 일락의 변호로 무마되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참 친자가 아니라고 내쳐지던 일락이 허삼관의 불륜혐의를 벗겨줌으로써 허삼관의 점수를 땄다는 식이다. 만약 불륜이 없었다고 한다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소동극일 뿐이고, 불륜이 있었다고 한다면 죄의식을 덮어주는 기묘한 남성연대인 셈이다.



원작은 우스꽝스러운 스캔들을 나열하며 ‘도찐개찐’의 상황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자기반성을 통한 화해의 메시지가 숨어있다. 그래서 “이것은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는 원작자의 말이 이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의 주제의식을 날려버린다. 아내와의 화해는 없이, 원작에도 없는 장기매매를 등장시킨다. 즉 아들을 살리기 위해 ‘피를 파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장기를 파는 어머니’로 끝맺는다. 그리고 온가족 외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한다. 늙어서 더 이상 매혈을 할 수 없어 눈물 흘리는 허삼관과 그를 유일하게 이해하는 아내와의 대화로 맺는 원작의 엔딩과는 사뭇 다르다.

영화는 연극적인 대사와 떠들썩한 소동극으로 웃음을 주다가, 후반부의 폭풍 같은 신파와 가족애로 마무리 짓는다. 무리하게 매혈하는 허삼관이나 가족의 상봉, 그리고 영화 내내 부차적으로 취급되다가 마지막 한방을 보여주는 모정 등은 모두 ‘전반부에 웃기다가 후반부에 울리는’ 기본 구조에 충실하다. 그 결과 원작이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넘어섰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부각되는 역작용이 일어난다.

‘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친자는 어쨌든 중요하며, 언제 어떻게 아들로 받아들여진 건진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아들로 받아들였고,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한 부정은 숭고하고 모정은 더 숭고한데, 아내와의 화해는 필요 없이 자식의 아빠·엄마로서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낡은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이다. 영화는 원작의 웃기는 상황극이나 허삼관의 느긋한 묘미의 말투를 재미나게 옮겼지만, 원작의 주제의식과 페이소스는 담지 못한다. 즉 유쾌한 ‘허삼관’은 있지만, 불편하게 찌르는 ‘매혈기’는 잘라먹은 형국이다. 유산균이 없는 ‘요구르트 맛 음료’랄까. 웃기엔 좀 애매하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허삼관>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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