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한 작가 드라마가 끌리면서도 불쾌해지는 건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임성한 작가는 지난 주 방영된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 백야> 65회 30여분을 '원샷원킬'로 처리했다. 물론 임성한 작가가 과거 그녀의 다른 드라마에서도 ‘원샷원킬’ 폭탄을 안 썼던 건 아니었다. MBC 일일드라마 <아현동 마님>에서는 두 등장인물이 20여분 동안 <텔미> 춤을 추며 억지춘향 같은 사극쇼를 펼쳤다. 하지만 <압구정 백야> 65회의 ‘원샷원킬’은 <아현동 마님>과는 차원이 달랐다. 더불어 <신기생뎐>의 레이저쇼나 <오로라 공주>의 ‘데스노트’ 전개처럼 시청자들을 황당하게 했던 것도 아니었다. <압구정 백야>의 65회는 지극히 정공법으로 하지만 그녀 특유의 사나운 언어의 송곳니로 으르렁 으르렁댄 회차였다.

65회의 등장인물은 여주인공 백야(박하나)와 서은하(이보희) 단 둘이었다. 장소 또한 백야의 결혼상대인 조나단(김민수)과 백야가 로드매니저로 케어했던 조지아(황정서), 그리고 백야를 낳아준 친엄마이자 조나단과 조지아의 계모인 서은하가 사는 집의 주방과 거실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우아하고 고상한 상류층의 거실이 지옥의 링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압구정 백야> 65회는 이 드라마를 꾸준히 지켜본 이들이라면 기다려왔던 회차이기도 했다. 대개 출생의 비밀을 안고 시작하는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의 정점은 주인공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그 정점은 드라마가 마지막 회에 가까워지는 순간쯤이 정상이다. 당연히 시청자들에게 65회는 그저 백야와 서은하가 말싸움 좀 하다가 “그래, 내 아들과 결혼해서 어디 한 번 잘 사나 보자. 내가 너 헌신짝처럼 이 집에서 쫓겨나게 만들 거야” 정도로 마무리 되어야 할 때였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느긋해하는 사이 임성한 작가는 출생의 비밀을 터뜨리는 절정의 순간을 드라마 중반으로 확 끌어당겼다.

더군다나 그 출생의 비밀을 앞뒤로 <압구정백야> 65회는 육탄전과 심리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싸움의 시작은 잔잔했다. 서은하는 백야를 살살 달래며 자신의 의붓딸 조지아를 친오빠처럼 여기는 예능PD 장화엄(강은탁)과 연결해 달라 부탁한다. 하지만 백야는 싸늘하게 이를 거절하며 서은하를 도발한다. 이에 서은하는 손에 쥐고 있던 물컵의 물을 백야에게 끼얹으며 물따귀를 때린다. 백야가 물컵을 벽에 던져 깨뜨리면서 본격적인 육탄전이 이어진다. 서은하에 머리를 쥐어뜯기고 등짝을 얻어맞던 백야는 하지만 심리전으로 싸움의 양상을 뒤집는다. 바로 자신이 서은하의 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심리폭탄을 이용해서다.



“내가 왜 청첩장 안 찍었는지 알아! 신랑 측 엄마 신부 측 엄마 이름이 같으니 대략 난감 아니야!” (백야)

이 순간 시청자들은 모두 당황했을 것이다. 아니면 임성한 작가의 흔한 트릭대로 꿈이나 상상일 거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갑자기 서늘한 전자음이 감도는 백그라운드 음악과 함께 백야의 구구절절한 고백으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부정하던 서은하는 “아가, 아가.” 울음을 터뜨리며 이내 백야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 고백은 백야의 친오빠 백영준(심형탁)의 죽음을 알리면서 정점에 치달았다. 백그라운드 음악 또한 서글픈 멜로디로 변했다. 이어 드라마는 두 여인의 눈물바다로 이어지면서 일차전을 끝냈다.

하지만 일차전에서 끝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싸움은 잠깐의 휴식과 함께 이차전에 돌입했다. 이차전은 일차전에 비해 좀 더 복잡한 플롯을 지닌 싸움이었다. 서로를 할퀴는 싸움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추악한 내면을 벌거벗기는 싸움이어서였다. 싸움의 떡밥을 처음 던진 사람은 서은하였다. 서은하는 자신이 백영준을 카페에서 만났던 때의 일을 거짓말로 둘러댄다. 신경을 거스르는 날카로운 백그라운드 음악과 함께. 하지만 백야는 오빠의 스마트폰이 켜져 있어서 이미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를 다 들은 터였다. 백야는 싸늘하게 친엄마를 비웃으며 마치 친오빠의 귀신이 씌운 듯 그때 오빠가 하던 말을 낮은 목소리로 고스란히 읊는다.



“알아보시겠어요. 어머니 거의 안 변하셨어요. 기억나요.”

이어 서은하의 야멸친 대화도 똑같이 읊는다.

“우리 그냥 모른 채 살아. 내 형편이 그래.”

자신이 냉정하게 떠들어댄 이야기가 모두 나오자 서은하는 당황한다. 그리고 백야를 사기꾼으로 몰아가며 너는 가짜라고 말한다. 하지만 백야는 차분하게 어떻게 그 대화를 모두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이내 서은하를 경멸하듯 말한다. 이때 흐르는 백그라운드 음악은 비극적인 오페라의 아리아다.

“이게 당신이야. 나보고 버러지? 맞아, 버러지가 버러지 낳았지. 사람이 낳았을 리 있어?” (백야)

그런데 이 <압구정 백야>의 ‘버러지’라는 대사는 묘한 울림을 갖는다.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가 끌리면서도 기분이 불쾌해지는 것은 사실은 그래서다. 진지한 장면에서 뜬금없이 남자주인공이 코피를 주룩 흘려서가 아니다. 종종 무당이나 점괘가 등장해서도 아니다. 재미없는 옛날식 유머를 중년의 인물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떠드는 건 썰렁해도 무시하면 그만이다. <웃찾사>를 보다 죽는 건 혀를 끌끌 차면 그만이다. 혹은 <오로라 공주>의 마당 앞 핸드백 던지기 격투나 <압구정 백야>의 수영장 여인들 개싸움처럼 드라마에서 상상도 못한 창의적인 싸움 장면에서는 절로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임성한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인물들이 가난하건 부자건 천박하건 교양 있건 상관없이 그 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속물성이 빤히 드러난다. 더구나 어느 순간 그 팔딱팔딱 뛰는 생생한 속물성이 현실 속 인간의 내면처럼 느껴져서 소름 돋는다. 우습다가도 우스운 게 아니라 속이 좀 불편해진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이 세계의 인간이, 인간이 아니라 버러지처럼 여겨진다. 더구나 벌레와는 다르게 버러지는 정말 인간과 벌레의 합성어 같지 않은가?

그러니 드라마를 보며 마음의 정화나 건강한 웃음 아닌 인간 내면의 버러지를 느끼는 것이 껄끄럽다면 <압구정 백야>는 애당초 피하는 것이 좋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가 톡 까놓고 화장 지우고 ‘빤스’ 벗고 속말 다하면 버러지지, 버러지끼리 와글와글 다투는 거 그거 보는 게 얼마나 꿀맛인데, 이런 마음이라면 <압구정 백야>는 독충과 꿀을 섞어 만든 달콤한 밀주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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