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 송지나 작가의 손끝에서 퍼지는 아름다운 울림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월화드라마 <힐러>에는 1980년대의 남자 김문식(박상원), 1990년대의 남자 김문호(유지태), 지금 현재의 남자 힐러 서정후(지창욱)가 주요인물로 등장한다. 각기 다른 시대에 뜨거운 젊음의 시기를 보낸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제각기 다르다. 80년대의 남자는 고뇌하지만 결국 탐욕스럽다. 90년대의 남자는 정의롭고 당당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헛발질한다. 지금 현재의 남자는 정의에는 관심 없고 돈에 따라 일만 해결하는 밤의 심부름꾼이다.

그러니 드라마 <힐러>를 제대로 보려면 80년대와 2014년 현재를 모두 살펴야만 한다.

“설마 81년부터 92년까지 연대순으로 쭉 읊으실 생각은 아니시죠?” (힐러 서정후)

하지만 어쩌겠나? 송지나 작가의 <힐러>는 연대순으로 쭉 읊진 않을지언정 서로 공명하는 80년대 90년대 그리고 현재 2014년을 두루 살펴야 그 감춰진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드라마인 것을.

80년대 초반 시대를 꼬집는 해적방송을 몰래 방송하던 힐러의 멤버였던 김문식은 10여년이 지난 후 권력의 꼬드김에 넘어가 친구를 배신한다. 이 배신으로 짝사랑하던 친구의 아내이자 힐러의 멤버였던 최명희(도지원)를 자신의 여자로 얻는 데는 성공한다. 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힐러의 멤버에서 어느새 의식 있는 기자로 성장한 두 친구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것도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이 두 친구의 아이가 바로 채영신(박민영)과 힐러 서정후(지창욱)다. 그날의 사건 이후 채영신은 김문식에 의해 버려져 고아원을 전전하다 변호사 채치수(박상면)의 입양아로 자란다. 서정후는 살인자의 아들이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친구 없는 아이로 자라난다.

한편 김문식의 동생인 김문호는 어린 시절 정의로운 형, 누나인 힐러 멤버들의 귀여운 꽃돌이였다. 그 후 형의 변절을 지켜본 김문호는 힐러의 멤버들에겐 죄의식을 갖고 사는 동시에 어느새 시대의 권력자들과 결탁한 형 김문식의 세계는 혐오한다. 그는 과거 힐러 멤버들을 위해 두 기자의 의문사 사건을 파헤치나 번번이 벽에 부딪쳐 실패한다.



친구 하나 없던 현재의 남자 서정후는 아버지의 옛 친구이자 힐러의 멤버였던 사부의 도움으로 밤의 심부름꾼인 코드명 ‘힐러’가 된다. 그리고 심부름꾼보다는 거의 슈퍼히어로에 가까운 운동신경을 자랑하며 살인 빼고 의뢰인이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하지만 힐러의 내면은 언제나 공허하다.

“사부, 나는 사는 데 이유가 없어. 그래서 겁이 나.” (힐러 서정후)

그러던 어느 날에 김문호의 부탁으로 기자 채영신의 뒤를 쫓으면서 힐러의 삶이 달라진다. 외로운 섬처럼 살아가던 이 현재의 남자가 실은 수많은 과거의 사건들과 얽혀있는 존재라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힐러 서정후)

드라마 <힐러>는 2014년 현재의 젊은 남자가 90년대 80년대의 젊은 남자들과 협력하거나 혹은 부딪치면서 자기 운명의 엉킨 줄을 풀어가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 운명을 풀어가는 힘은 바로 ‘사랑’이다. 그것도 트렌디한 드라마에 보이는 ‘금사빠’한 사랑이 아니라 느리고 시간이 걸리는 낭만적인 사랑이다.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드라마작가로 활동해온 송지나 작가에게는 다른 작가들과 차별화되는 독특한 낭만 같은 게 있다. 그런 작가만의 취향이나 감수성이 물씬 배어난 작품은 89년 겨울부터 90년 봄까지 방송했던 MBC 드라마 <서울시나위>가 아닐까 한다. 세차장에서 일하는 만수(변우민)가 주인의 폭언을 참지 못하고 비밀장부를 빼돌려 지프차를 훔쳐타고 도망치면서 <서울시나위>는 시작한다. 여기에 오수생이자 어딘지 달나라 돈키호테 같은 기태(박상원)와 인신매매단에 붙잡혔다 도망친 여자 유정(임미영)이 합류한다. 이 드라마는 지프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이 세 명이 각각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겪어가며 성장하는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드라마다. 전형적인 로드무비 형식의 이 드라마는 그렇게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당시의 일반적인 드라마들과는 차별화된 독특한 낭만이 있었다.

그 낭만은 이후 그녀의 대표작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에서 좀 더 무겁게 변주된다. 그건 떠돌이 같고, 거칠고, 좌충우돌하고, 시대와 부딪치지만, 마음만은 정의로운 남자들에 대한 낭만이기도하다. 그리고 그 남자를 움직이게 하는 건 언제나 겉보기엔 여리나 내면은 강한 여자에 대한 낭만적인 사랑이다. 아날로그적인 인물에 어울리는 그 낭만의 드라마는 디지털시대의 약삭빠른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2014년 현재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아날로그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을 그녀는 <힐러>를 통해 꽤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힐러>의 드라마 속 80년대, 90년대, 현재의 남자를 움직이는 건 놀랍게도 낡은 단어인 사랑이다. 하지만 80년대의 엘리트마초 김문식의 사랑은 그녀가 여신처럼 흠모하던 최명희를 병자로 만들었다. 90년대의 지적인 나르시시스트 김문호는 이 세상 상처받은 사람들 모두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누구도 감동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밤의 심부름꾼 힐러는 채영신에 대한 사랑 덕에 밤의 세계가 아닌 밝은 세상으로 나온다. 고독한 섬처럼 자라온 남자아이에게 사랑은 그의 얼어붙은 심장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유년의 끔찍한 기억을 지닌 여자아이에게 사랑은 그녀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SNS로 연결되어 있지만 여전히 섬처럼 외로운 사람들에게 송지나 작가가 그리는 손끝과 손끝이 스치듯 닿는 낭만적인 사랑은 독특하고 아름다운 울림을 준다.

“그 눈을 봐야했어요.” (힐러의 파트너 해커 조민자 님이 채영신을 직접 찾아가 힐러의 집을 알려주며 하는 대사)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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