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스나이퍼’ 정말 호전적인 우파 영화일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지난 주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흥행 수익이 2억 8천만 달러를 돌파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 중 최고 흥행작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큰 수익을 거둔 전쟁 영화가 되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이스트우드 최고 걸작은 아닐지 몰라도 여전히 거장의 노련한 손길을 거친 준수한 영화이다. 이런 영화가 질에 맞는 좋은 대접을 받는다면 그건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열풍은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다.

가장 괴상한 뉴스. 미국의 어떤 스테이크 식당에서는 세스 로겐과 마이클 무어를 출입금지한다는 표지를 걸었다. 그건 두 사람이 정치적 이유로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혹평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혹평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정치적인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이 식당주인은 이 영화에 대한 혹평을 비애국적인 행위라고 본다.

스테이크 식당의 출입금지 자체는 해프닝에 불과하지만 <아메리칸 스나이퍼>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수많은 증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거둔 3억 달러에 가까운 수익은 보통 때 같으면 영화관을 찾지 않았을 사람들이 일반적인 블록버스터 영화 때와는 다른 이유로 극장을 찾은 결과이다. 비슷한 예로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들 수 있다. 그 영화가 거둔 놀라운 흥행 수익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극장까지 행진해 와서 예수의 수난을 직접 목격하려 했던 기독교 신자들의 덕을 많이 보았다. 보다 가까운 예로는 요새 종종 나오는 우리나라의 천만 영화들을 생각하시면 되겠다.

이들이 영화를 보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왜곡된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영화를 보고 난 수많은 관객들의 외국인 혐오 감정, 특히 아랍계 이주민들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에 책임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9/11 이후에 대한 잘못된 역사를 받아들일 가능성도 높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정작 이런 흐름과 영화를 연결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를 반전 영화로 만들었다는 이스트우드의 주장은 잠시 잊자. 그 말을 믿지만 어차피 창작자가 자기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충 보아도 이 영화는 위에 언급한 모 스테이크 식당 주인이 본 영화와는 많이 달라 보인다. 조금 더 세게 간다면 영화는 노엄 촘스키나 A.O. 스코트와 같은 리버럴들이 본 영화와도 조금 달라 보인다. 그리고 이 양쪽에서 본 영화는 의외로 비슷하다.

여기서 차이점은 영화의 주인공인 실존인물 크리스 카일의 관점에 영화가 얼마나 동의하느냐이다. 많은 관객들은 상당히 동의한다고 믿는다. 여기서부터는 이스트우드가 공화당 지지자인 보수파이고 수많은 서부극의 주연 겸 연출자였다는 게 이유가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크리스 카일을 서부극의 총잡이와 동일시하고 이 이미지를 이스트우드와 연결시킨다.

하지만 이게 과연 맞는 말일까? 일단 이 영화는 보기만큼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아니다. 데이빗 O 러셀을 거쳐 스티븐 스필버그 손에서 꽤 오래 있었고 그 다음에 이스트우드에게로 넘어갔다. 이스트우드의 위치는 고용감독에 가까운데 그건 좋은 의미로 그렇다. 80세를 넘은 노장이 별다른 에고의 과시 없이 이런 프로젝트를 끌어가는 건 멋진 일이다. 게다가 그가 각본을 많이 고치지 않는 감독이라는 걸 잊지 말자. 그렇다면 서부의 총잡이 크리스 카일과 왕년의 서부극 영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관성을 불필요하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영화 속 크리스 카일은 영화가 백퍼센트 동조한다고 보기엔 수상쩍은 인물이다. 그의 언어를 보자. 그는 시종일관 그가 만나는 아랍 사람들을 '멍청한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가 그에게 100퍼센트 동조하는 호전적인 우파 영화였다면 이런 언어는 당연히 검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방치한다.

그의 첫 희생자가 어린이와 여자라는 사실은 어떤가? 그가 이 영화에서 죄의식을 가장 적게 느끼는 평면적인 인물이라는 건 어떤가? 그에게 양을 지키는 양치기개라는 정체성을 안겨주는 도입부의 부자간 대화를 보라. 여기에 어떤 따뜻함이, 공감의 흔적이 느껴지는가? 심지어 많이들 지적하는 역사적 왜곡도 정확히는 왜곡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화는 오로지 크리스 카일이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영화 속 카일은 주어진 정보를 의심없이 믿고 그에 따르는 사람이다. 영화가 그리는 카일과 카일이 속해있는 남부 총기 숭배 문화 묘사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 그건 이 영화가 좋은 작품이라는 의미와 연결된다.

이 영화를 호전적인 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건 그렇게 단순하게 만들어진 크리스 카일 캐릭터마저도 기어코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라는 영화의 후반은 거의 전적으로 이러한 아이러니에 의해 지탱된다. 크리스 카일은 끝까지 자신이 올바른 일을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그런 신념에서 떨어져 나간 전우를 비난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반복해 거치면서 (영화는 카운트다운이라도 하는 것처럼 파병횟수를 꼼꼼하게 센다) 그는 정신적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그는 끝끝내 인정하지 않지만, 후반 장면에서 팔다리가 잘린 채 돌아온 군인들과 그는 거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어떻게 봐도 할리우드 반전영화의 논리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정치성이 이상한 방향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 이스트우드 자신의 위치이다. 우파적 감수성의 감독이 우파적 재료를 갖고 우파적 관점을 가진 인물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으니 기계적으로 정치성이 정해진다. 이렇게 형성된 정치성에 끌려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관습과 정치성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이 몰려들면 영화는 노골적으로 오독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이들을 끊어낼만큼 분명한 메시지를 드러내지 않는 건 예술적으로 탓할 일이 아니지만 이는 이들의 오독을 방지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오독은 현실세계에 부인할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친다.

슬픈 교훈이 추가된다. 예술이 오로지 예술의 영역에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예술작품은 작품을 소비하는 관객들에 의해 완성되지만 정작 예술가는 소비자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나쁜 소비자는 종종 좋은 작품의 수준을 깎아먹는다는 것.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이에 대한 책임은 예술가가 져야 한다는 것.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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