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된 김래원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후반부에 이르러 너무 잦은 반전 탓에 박경수 작가의 <펀치>에 피로감이 쌓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주인공 박정환을 연기하는 김래원은 <펀치>에서 더 이상 흠잡을 점이 없을 것 같다. 속물적인 인간, 시한부 인생, 정의로운 검사, 거기에 더해 윗분들의 견고한 시스템에 의해 늘 허탈하게 당하는 초라한 인간까지. 어느덧 삼십대 중반에 이른 배우 김래원은 <펀치>에서 가장 복잡한 플롯을 지닌 인물 박정환을 무리 없이 소화한다.

물론 취향에 따라 소가 여물 씹듯이 눈을 끔뻑이며 대사를 반추하고 반박자쯤 무겁게 끌어가는 그의 연기가 취향에 맞지 않을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너무 많은 반전과 속도전으로 끌고 가는 <펀치>에서 그나마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하는 건 드라마 속 김래원의 묵직함 덕이다.

데뷔 때부터 김래원이 이런 묵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또래의 다른 젊은 연기자들처럼 발랄하거나 만화 속 주인공 같은 꽃미남의 분위기 또한 아니었다. 90년대 후반 청소년 드라마 <나>에 등장할 때부터 <옥탑방 고양이>에 이르기까지, 혹은 영화 <청춘>에서의 모습처럼 김래원의 페르소나는 또래의 평범하고 건강한 청년이었다. 물론 거기에 작품 속 캐릭터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이뤄지기는 했다. 좀 더 양아치스럽거나, 좀 더 모범생 같거나, 좀 더 내성적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김래원을 다시 보게 만든 드라마는 2004년 MBC에서 방영된 <사랑한다 말해줘>였다. 이 작품은 그다지 시청률이 높지 않았던 작품이지만 김래원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작품이 아닐까 한다. 이 드라마에서 김래원은 기존에 그가 연기했던 인물들보다 조금 더 복잡한 상황에 처한 캐릭터를 만난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김병수는 한 영화사의 신입사원이다. 하지만 기존의 김래원이 연기했던 엇비슷한 청년은 아니다. 그는 이 영화사의 대표인 연상의 여자 조이나(염정아)와 순수한 어린시절의 여자친구 서영채(윤소이) 사이에 놓인 인물이다. 그런데 <사랑한다 말해줘>의 삼각구도에서 주인공 김병수는 양다리를 걸치는 바람둥이가 아니다. 오히려 이 구도를 마구잡이로 흔드는 인물은 젊은 시절엔 일에 미쳐 있다 뒤늦게 불같은 사랑에 눈 뜬 여인 조이나다. 김병수는 이 때문에 흔들리고 또 갈등하는 외모는 듬직하나 가슴은 여린 남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보통의 평범한 드라마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 낯선 남자를 김래원은 풍부한 감정으로 연기한다. 그렇기에 <사랑한다 말해줘>는 과거 김래원이 연기했던 평범하고 건강한 청년이 조이나라는 연상의 여인에 의해 붕괴되고 좀더 복잡한 내면을 지닌 청년으로 변화해가는 걸 지켜보는 묘한 재미가 있는 드라마였다.



2011년 SBS <천일의 약속>에 남자주인공 박지형으로 등장한 김래원은 더 이상 풋풋한 청년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로 자신을 잃어가는 여주인공을 지켜보는 김래원은 오랜만에 드라마로 돌아와 <천일의 약속>에서 꽤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작가 김수현의 대사를 ‘다다다다’ 속사포 식이 아니라 자기만의 스타일로 곱씹어서 연기하는 젊은 배우는 <청춘의 덫>의 심은하 이후 오랜만이었다.

2014년 박경수 작가의 <펀치>는 <옥탑방 고양이>에서 아는 여자의 옥탑방에 몰래 숨어드는 추리닝 입은 철부지로 김래원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날리는 펀치이기도하다. 어느덧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된 김래원은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삼십대 남자와 슬픔에 복받쳐 울 줄 아는 삼십대 남자의 양면성을 하나의 인간인 듯 극적으로 연기해냈다. 더불어 손현주로 대표되는 박경수 작가 작품 속 남자주인공들의 특징인 억울한 얼굴 표정 역시 김래원은 일품이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MBC, 영화 <청춘>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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