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크롤러’ 선정적 뉴스가 문제인 진짜 이유

[엔터미디어=황진미의 편파평론] △이 영화 찬(贊)△.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영화 <나이트크롤러>는 잘 빠진 범죄스릴러이자,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행태를 고발하는 사회극인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하는 성공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섬뜩하게 보여주는 반영웅 서사이다.

영화는 밤거리를 배회하던 루이스(제이크 질렌할)가 경찰의 검문을 받자, 의문스러운 변명을 하다가 경찰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별로 범죄자처럼 보이지 않던 그는 사실 철근이나 맨홀 뚜껑 등을 훔쳐다가 고물상에 파는 좀도둑이었다. 하지만 좀도둑치고는 언변이 수려하다. 제법 당당하게 장물 값을 흥정하기도 하고, 자신이 ‘준비된 일꾼’이라며 ‘무급인턴’으로라도 채용해 달라 말한다. 하지만 고물상사장은 “도둑놈은 안 뽑아”란 한마디로 일축해버린다. 다시 밤거리를 배회하던 그는 우연히 사고현장을 목격한다. 그런데 바람처럼 나타나 응급구조장면을 촬영하고 지역TV 방송국에 값을 흥정하는 자가 있는 게 아닌가. 이런 놀라운 돈벌이가 있음을 알게 된 루이스는 장물을 경찰무전기와 비디오카메라로 바꾸어 속칭 ‘나이트크롤러’의 세계에 합류한다.

◆ 선정적인 화면이 돈이 되는 ‘나이트크롤러’의 세계

영화 <나이트크롤러>는 사고 현장을 찍은 화면들이 거래되는 모습을 통해 TV뉴스의 선정성을 폭로한다. 시청률을 의식한 지역TV 방송국은 생생한 사고 장면이 찍힌 화면을 사들인다. 영화는 어떤 장면이 돈이 되는지를 통해 선정적인 뉴스의 지향점을 짚어준다. 교통사고든 범죄현장이든 유혈이 낭자할수록 고가에 거래되며, 특히 백인부자가 죽거나 다치는 장면은 가장 값이 높다. 평화로운 일상에 침입한 참사를 통해 ‘공포’를 불러일으킬 것, 이것이 이런 뉴스의 지향점이다.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실업이나 경제난, 복지축소 같은 정책들이지만, 우발적인 사고나 범죄의 위험성이 훨씬 크게 부풀려진다. 이에 대한 공포는 안전에 대한 개인적인 대책을 강구하거나 공권력의 강화로 이어진다. 시민들은 공동체의 주인이 아니라 불안에 떠는 보안과 치안의 소비자로 전락한다. “우리 생활을 결정짓는 복지정책 등은 22초 단신으로 다루어지고, 범죄 사건은 5분 40초짜리 꼭지로 다루어진다.”는 영화 속 대사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안전담론을 관통하는 언론의 병폐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루이스가 한발 앞서 도착하여, 한발 더 들어가서 찍은 참혹한 장면들은 방송국의 입맛에 딱 맞는다. 보도국장의 칭찬으로 ‘감을 잡은’ 루이스는 더 빨리 도착하여 더 가까이서 찍기 위해 난폭운전으로 밤거리를 질주하고, 폴리스라인을 넘는다. 루이스의 위반이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그려진다. 좀 더 밀착해서 찍다가 쫓겨나거나 경찰 몰래 폴리스라인을 넘어 들어가거나 창문을 통해 찍는 정도이다. 루이스의 사소한 위반을 문제 삼는 ‘보도윤리’가 언급되지만, 시청률의 압박을 받는 보도국장은 번번이 이를 무시한다. 루이스는 조금씩 위반의 폭을 넓혀간다. 그는 원하는 영상의 각도를 위해 현장을 살짝 훼손하고, 시신을 잡아끌어 촬영 하는데, 영화는 그 장면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고 무심하게 보여준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루이스가 생생한 화면을 얻기 위해 벌이는 ‘기획’을 보여준다.

루이스의 ‘기획’은 경악스럽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사건을 조작했다거나 적극적인 살육을 벌였다고 보긴 힘들다. 그의 기획은 ‘좋은 영상을 얻기 위해’ 일련의 사건들 중에서 아주 약간의 사실을 은폐하거나 선후를 조금 바꾸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결과는 엄청나지만, 이는 사소한 보도윤리에 대한 무시가 차츰 누적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영화 <나이트크롤러>는 누가 얼마나 죽든,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오직 ‘대박화면’을 얻는데 올인 하는 루이스를 통해 사소한 윤리적 위반으로 시작된 섬뜩한 결과를 보여준다. 루이스만이 문제가 아니다. 고급주택가 총격사건은 ‘묻지마 강도사건’이 아닌 ‘마약조직사건’이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에게 체감될 공포를 과장하고픈 언론은 사건의 본질을 왜곡한다. 영화는 시청률이 곧 돈인 상황에서 잔혹한 사고 장면을 쫓는 하이에나 같은 언론과 그러한 언론환경에 길들여진 채 공포를 탐식하는 시청자들의 소비행태를 동시에 비춘다.



◆ 성공학의 화신, 이 남자가 사는 법

<나이트크롤러>가 흔치 않은 수작인 이유는 단순히 언론환경을 고발하는 사회극에 그치지 않고, 우리사회가 작동되는 근원적인 메커니즘과 윤리의 문제를 탐문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루이스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영화의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루이스는 처음 ‘나이트크롤러’로 나서면서 부하직원을 한 명 뽑는다. 부하직원은 평범한 ‘잉여’이다. 돈도 가족도 스펙도 없으며, 특별한 의욕이나 자신을 포장할 재주도 없다. 반면 루이스는 성공학으로 무장한 사람이다.

루이스와 부하직원은 빈털터리에 직장도 없긴 마찬가지지만, 둘은 매우 다르다. 루이스는 장물을 팔러간 고물상에서도 자신을 채용해달라는 프레젠테이션을 하지만, 부하직원은 면접을 보러 온 자리에서도 자신을 왜 뽑아야하는지 표현하지 못한다. 루이스는 그를 답답해하면서, ‘무급인턴’으로 채용한다. 이는 루이스가 가장 경쟁력 없는 청년에게 채용을 빌미로 열정을 착취하는 셈이다. 두 사람을 보면 흔히 성공학이나 자기 계발서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성공하는 사람의 특징’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루이스는 과연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갖춘 사람답게 끊임없이 노력하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며, 한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똑같이 가난해도 루이스를 고용주이게끔 하며, 그를 ‘성공’으로 이끈다.



루이스는 자기 말처럼, 과연 일을 빨리 배운다. 그는 어떤 화면이 돈이 되는지 금세 알아듣고, 자신이 납품한 장면이 방송되는 뉴스화면과 자막을 꼼꼼히 연구한다. 방송국 사람들 중 자신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간파하여, 그의 마음을 얻는다. 루이스가 찍은 화면이 연일 특종을 터뜨리자, 그는 관계의 우위에서 보도국장에게 은밀한 요구를 한다. 그는 용의 꼬리가 되느니 뱀의 머리가 되라는 말처럼, 경쟁자의 근사한 스카우트 제안을 뿌리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경쟁자를 물리친다. 그는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했을 때, 푼돈이나 받는 나이트크롤러가 아니라 저작권을 인정받는 뉴스공급업자로 방송국과의 협상을 따낸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원대한 비전과 성공에 대한 확신에 가득 찬 사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나이트크롤러>는 그의 성공과 더불어, 그의 성공이 지닌 이면을 보여준다. 그는 부하직원을 닦달하며 착취하고, 필요에 따라 승진을 미끼로 회유하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차 없이 희생시킨다. 루이스는 이 모든 것에 아전인수 격의 의미를 부여한다. 부하직원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다 죽었고, 그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나의 미래’가 아니라!) ‘회사의 미래’에 누를 끼칠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의 욕망’은 소거시킨 채, 그 자리에 그럴듯한 대의를 집어넣는 센스에 주목하라.)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사람 목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소시오패스의 정의에 부합되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유능한 경영자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영화 <나이트크롤러>의 놀라운 주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수많은 영화에서 살인마의 모습으로 그려졌던 소시오패스들은 굳이 그렇게 그려질 필요가 없었다. 경쟁을 위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시오패스의 속성은 그대로 가장 유능한 경영자에게 요구되는 덕성이다. 소시오패스는 굳이 살인마들 사이에서 찾을 필요 없이 성공한 경영자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루이스는 성공학이 가르쳐준 자기계발의 논리와 처세술에 입각하여 맨손으로 회사를 일군 자수성가자이다. 죽은 부하직원은 어찌 되는 것이냐고? 성공학이나 자기계발서에 그런 인물은 실패하고 도태되고 낙오될 수밖에 없다고 쓰여 있다. 그것은 그의 게으름이나 무능이나 불운 탓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는 루이스 같은 인물이 성공하는 데 불쏘시개일 뿐이며, 아무도 그의 죽음은 신경 쓰지 않는다.

영화는 루이스가 새로 뽑은 예닐곱 명의 ‘무급인턴’ 사원들을 보여주며 끝난다. 그들은 내심 루이스를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그의 규칙을 잘 지키며 경쟁에서 이기길 다짐할 것이다. 그중 한둘은 루이스처럼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소모되고 버려지거나 운이 나쁘면 죽을 것이다. 소시오패스라는 악마가 최종승자가 되는 사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무간지옥이다.

칼럼니스트 황진미 chingmee@naver.com

[사진=영화 <나이트크롤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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