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맨’ 속 김치 냄새 발언 어떻게 봐야 할까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버드맨>이 이번 주에 개봉한다. 한 번 극장에서 보시라고 추천한다.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엄청난 역량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제 선택과 과잉 감정으로 주저 앉았던 감독인데 이 영화에서는 그런 불일치가 보이지 않는다. 오래간만에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영화인 것이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놓고 경합을 벌인 <보이후드>와 <버드맨> 중 어느 게 더 뛰어난 영화냐는 질문은 무의미하지만 앞으로도 <버드맨>이 부적절한 선택이란 말을 들을 것 같지는 않다.

단지 한국 사람들에게는 걸리는 것이 있다. 이 영화가 한국인 비하와 아시아인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충 세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마이클 키튼 딸로 나오는 엠마 스톤 캐릭터가 한국인 주인이 운영하는 그로서리 스토어에 갔다가 모든 꽃에서 김치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한국 관객들이 가장 예민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잭 갤리피아나키스가 마이클 키튼에게 숙취에 쩌든 모습이 몽골로이드 같다고 말하는 장면이 또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마도 일본인인 것 같은 영어 서툰 저널리스트가 단체 인터뷰에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키튼 캐릭터가 더 이상 수퍼히어로 물인 <버드맨> 시리즈에 출연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자 "<버드맨 4>가 나와요?"라고 외치는 장면. 이들은 모두 인종차별적일 수도, 문화차별적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여기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다. 시사회에서도 여기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런 것들은 충분히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단지 그렇다고 해서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을 유난 떠는 사람들이라고 밀어붙이고 싶지도 않다. 여러 번 말하지만 나는 유난떤다는 말을 싫어한다. 아무리 어이가 없는 생각이라도 유난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에서 말했지만 이건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래서 좀 따져보기로 했다. 물론 난 관심법을 모르기 때문에 곤잘레스 이냐리투와 작가들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그냥 맥락 안에서 따져볼 수만 있을 뿐이다. 대부분 이런 식의 시도가 그렇듯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엉뚱한 길로 빠질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 그 점은 미리 이해하시길.



일단 김치 발언. 맥락을 보자. 엠마 스톤 캐릭터는 마이클 키튼 캐릭터의 딸 겸 비서인데,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꽃을 사러 한국인 주인이 운영하는 그로서리 스토어에 갔다. 마이클 키튼은 영상 통화로 딸에게 향기 좋은 꽃을 사오라고 하는데, 딸은 모든 꽃에서 김치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고 무슨 의미인가. 만약 영화 속 누군가가 한국인 캐릭터를 향해 "너한테는 김치 냄새가 나!"라고 말하면 그 캐릭터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 (물론 그 캐릭터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해서 그 영화가 인종차별적이란 뜻은 아니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이다.) 하지만 지금 엠마 스톤은 한국인 주인이 듣고 있는 중인데 저 너머 극장 분장실에 있는 아버지에게 김치 냄새가 난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해보자. 인종차별적인 발언은 대부분 말하는 사람이 사회적, 물리적 우위에 있을 경우에나 가능하다. 하지만 엠마 스톤 캐릭터는 그 중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냥 이런 말을 하면서 한국인 주인의 반응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한국인 주인은 영어를 잘 못하는 전형적인 아시아 가게 주인의 스테레오타이프인데 김치 냄새가 난다는 말 정도도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사가 나왔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버드맨>의 세계가 정말로 현실세계의 규칙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사실적인 곳이라면 정말 김치 냄새가 났기 때문이 아닐까? 꽃가게라면 의심스럽지만 그로서리 스토어라면 조금 넉넉한 해석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엠마 스톤 캐릭터가 있는 곳은 어떤 특별한 이유로 꽃향기를 가릴 정도로 김치 냄새가 나는 곳일 가능성이 크다. 그 상황이 뭔지는 모른다. 근처에서 김장을 했거나 옆에서 큰 통 하나를 땄다거나.

솔직히 작가들이 깊이 생각했을 거 같지는 않다. 그들은 일단 그렇게 좋다고 할 수 없는 독한 냄새가 하나 필요했을 거고 김치 냄새는 그 대답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서 냄새와 후각은 후반 클라이맥스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연결되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도구로 김치가 동원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가는 것도 같은데 여전히 기분은 좋지 않다. 김치가 긍정적인 의미로 등장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세상엔 고약한 냄새가 나는 수많은 음식이 있다. 스웨덴에는 수르스트뢰밍이 있고 프랑스에는 블루 치즈가 있으며 중국에는 취두부가 있다. <버드맨>의 이 장면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김치와 프랑스 치즈를 바꿔넣고 생각해보자고 한다. 난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김치와 블루 치즈는 이미지가 같지 않다. 김치와 치즈를 바꾸면 지금과는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일단 우리는 치즈 냄새 나는 프랑스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김치는 치즈보다 부정적인 기능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린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김치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데 과연 그러면서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걸까? 고약한 냄새가 나는 음식은 문화마다 다른 의미를 가진다. 스웨덴 사람들 앞에서 수르스트뢰밍의 냄새를 맡고 질겁한 티를 낸다면 오히려 그들은 즐거워할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 앞에서 치즈 냄새에 거부감을 표시한다면 우리가 충분히 미식가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취두부는? 김치는? 청국장은? 난 잘 모르겠다. 우리도 김치 냄새가 향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익숙해지면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여전히 강한 냄새이며 이 냄새가 나는 옷을 입고 외출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에 대해 외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에티켓의 하한선은 어디인가? <버드맨>의 작가들이 이 답을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모르는데. 이 정도라면 그냥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것들을 보자. 영어 못하는 <버드맨> 팬은 전형적인 일본인 오타쿠 스테레오타이프이다. 몽골로이드는 인종비하적 단어이다. 그렇다고 곤잘레스 이냐리투를 일본인 혐오주의자나 동북아시아인 혐오주의자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다. 그는 <바벨>에서 키쿠치 린코와 야쿠쇼 코지 주연의 작은 일본 영화 하나를 통째로 삽입했고 <비우티풀>을 <해변의 카프카>의 인용구로 시작했다. 앞뒤가 괴상하게 안 맞는 것이다. 참, 그러고보니 무라카미 하루키도 이 영화를 좋게 보았다고 한다. 전작의 인용구 때문은 아니겠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난 <버드맨>을 만든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자인지 모른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에티켓의 차이가 있다고는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이 손님이라면 우린 가장 높은 수준의 에티켓을 지킨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 되면 그 수준은 조금씩 내려간다. <버드맨>이 미국에서 개봉된 지 꽤 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이슈화된 게 비교적 최근이고 그 지점이 한국인 이유도 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거 같다. 난 시사회 이전에 '버드맨 + 김치'로 인터넷을 검색했는데, 관련된 게시물을 1월 달치 하나밖에 찾지 못했다. 비교적 잘 정리된 그 블로그의 내용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터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여간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인종주의를 지우거나 무시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미국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이 인종차별이 흑인이나 라틴 아메리카계에 대한 인종차별과 전혀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발언이나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 상당수가 자신이 '동남아'를 인종차별적 의미로 쓴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처럼.

나는 이 경우의 예로 아카데미 감독상 수상작인 <크래시>를 든다. 로스앤젤레스를 무대로 미국 다인종 사회의 인종충돌을 그린 이 영화에서 이상한 점은 동북 아시아인들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신매매를 하는 한국인 부부가 나오긴 하지만 그들은 영어도 못하고 이름도 이상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의미있는 소통이 불가능한 타자로 남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의 아시아인은 흑인의 두 배가 넘는다! 물론 이들 중 상당수는 미국에서 태어난 영어구사자들이다. 그런데도 <크래시>의 작가들은 아시아인들을 그들의 드라마에 넣지 않았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영화가 너무나도 전형적인 아시아인 인종차별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시아인들을 우스꽝스러운 타자로 만들고 보이지 않는 구석에 밀어넣는. 악의가 없다고 치더라도 <버드맨> 역시 그 영향 아래 있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할까. 글쎄. 여전히 나는 영화 속의 그 대사에서 그렇게 큰 악의를 읽는 것엔 반대다. 하지만 그런 묘사에 불쾌해하는 한국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건 의미가 있다. 우린 그들의 고객이고 심지어 그들은 한국 고궁을 배경으로 한 <버드맨> 포스터를 따로 만들었다는 걸 잊지 말자. 그쪽에서 답변을 한다면 그건 대화이니 좋은 일이다. 그렇게 넘기고 난 다음엔 보다 노골적인 인종주의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이 순서고 세련된 대응법이다. 그것이 미국의 아시아인 인종차별이건 우리 자신이 행하는 인종차별이건. 솔직히 <버드맨> 정도로 따지면 우리도 민망한 게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버드맨>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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