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인격 드라마 ‘킬미힐미’에 빠져드는 이유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MBC 수목드라마 <킬미힐미>의 다중인격 드라마다. 다중인격의 남자주인공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드라마의 정체성 자체가 그렇다. 초반 이 드라마는 당연히 병맛스러운 코미디의 성격이 짙었다. 아이라인 짙게 칠한 차도현(지성)의 인격 신세기가 오리진(황정음)과 만나는 장면부터 그러했다.

“2015년 1월 7일 오후 10시 정각, 내가 너에게 반한 시간” (신세기)

영화 <아비정전>의 대사를 패러디한 것 같은 이 대사는 이 드라마의 성격을 대략 짐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트콤과 정극을 오가는 해리성정체성장애 드라마의 탄생일 거라는 예감 말이다. 하지만 그 후 <킬미힐미>가 보여주는 드라마의 다중인격은 예상을 뛰어넘는 지점들을 보여주었다.

“왜 장르가 로코에서 액션으로 바뀌어.”

“에로야?”

“브로맨스야?”(오리진)

그리고 드라마가 종반부에 다다른 지금 신세기의 닭살 돋는 허세 대사는 전혀 다르게 읽힌다.

“2015년 1월 7일 오후 10시 정각, 내가 너에게 반한 시간”

아마 드라마 <킬미힐미>의 팬이라면 이 대사에서 묻어나는 상처받은 두 어린 영혼의 슬픔이 틀림없이 느껴질 것이다. 사실 <킬미힐미>의 무거운 중후반부는 드라마의 초반부나 중반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킬미힐미>의 초반은 예상대로 차도현(지성)의 다른 인격인 페리 박, 신세기, 안요나가 보여주는 난장판의 행렬을 보여주며 코믹한 모습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차도현과 그의 주치의인 오리진 사이의 관계가 달달해지면서 로맨스 드라마로의 변화도 충실히 보여주었다. 물론 이 로맨스에 약간의 곁가지가 덧붙기도 했다. 입양아인 쌍둥이여동생 오리진을 몰래 마음으로 좋아했던 오리온(박서준)의 아련한 감정이라든가, 브로맨스라 부르기엔 애매하나 무언가 브로맨스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차도현과 오리온의 관계가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킬미힐미>는 철저히 하지만 슬금슬금 다른 인격으로의 변신을 준비했다. 그건 차도현의 인격 중 가장 섬세하고 여리고 진지한 안요섭을 통해서다.

“죽음만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안요섭)

자살을 꿈꾸는 안요섭은 이 드라마가 단순히 웃고 즐기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단서였다. 그리고 오리진은 빌딩 옥상에 “킬미”라는 다잉메시지를 남기고 죽으려는 안요섭을 설득해 살려낸다. 오리진은 그 “킬미”라는 다잉메시지 위에 “힐미”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남긴다.

그 후 이 드라마는 다중인격인 남자주인공을 여자주인공이 변화시키는 로맨스물로 이어가기 않을까 했다. 허나 <킬미힐미>는 또 다시 인격을 바꾼다. “킬미”가 “힐미”로 가기 위해선 잊어버렸던 끔찍한 과거와 다시 대면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킬미힐미>가 중후반부에 보여줬던 다중인격은 무겁고도 치밀한 심리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옥죄는 밧줄처럼 다가왔다. 심지어 시청률을 포기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드라마는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니 말이다.

승진가의 지하실에 감금된 채 도현의 아버지인 차준표(안내상)에게 학대당했던 이혼한 아내의 딸 차도현(현 오리진). 밤마다 오리진에게 찾아와 친구가 되어주었던 마음씨 착한 남자아인 차준표의 아들 차준영(현 차도현). 하지만 그 여자아이가 학대받는 걸 지켜주지 못해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 차준영은 신세기란 인격을 만들어낸다. 그 신세기가 했던 첫 번째 일은 문을 잠근 채 아버지가 여자아이를 학대하는 지하실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 사건으로 여자아이가 죽은 줄로 알고 죄책감에 시달리다 본명을 잃어버린 그는 차도현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 과거가 드러나면서 현재의 두 주인공은 또 다시 고통 속에 빠진다. 사랑 넘치는 양부모의 손에 길러져 유년의 상처를 다 잊었던 오리진은 자신이 차도현이란 이름으로 승진가의 호적에 올랐던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더불어 망각했던 학대의 기억까지 모조리 다 떠올리고 만다. 한편 차도현 또한 자신이 원래 차도현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아버지를 삶도 아닌 죽음도 아닌 곳에 몰아넣은 것이 본인이라는 걸 깨닫고 절망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다행히 서로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여전히 옆에 있다. 차도현에겐 오리진이, 오리진에겐 차도현이.

그렇게 무거운 심리드라마였던 중후반부를 거쳐 종반부로 가는 <킬미힐미>는 그제야 두 연인이 사랑을 확인하는 로맨스물로 다시 인격을 바꾼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킬미힐미>가 이렇게 우리의 가슴에 감정적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이유는 뭘까? 그건 단순히 주인공 차도현과 오리진이 유년시절부터 엮여 있던 비극적 운명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비록 우리들 대다수가 승진가의 자제는 아니나 <킬미힐미>가 은유하는 이 이야기들이 우리가 겪었던 현실 속의 일들과 은근히 공명해서가 아닐까? 이미 어른이 된 우리들 혹은 주변의 친구들이 어린아이였을 때 겪었던 아픈 상처를 욱신거리게 만들어서는 아닐까?



자녀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욕심 많은 엄마 신화란(심혜진),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아빠 차준표(안내상), 그리고 그런 엄마 아빠 밑에서 순응하며 자랐지만 마음에는 짙게 멍이 들고 집에 들어가는 일이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가는 것만 같았던 아이들. 더구나 어른이 된들 마음속의 지하실은 여전히 그들을 따라온다. 혹은 두려운 삶을 견디기 위해 차도현처럼 스스로를 잃고 수많은 가면의 얼굴로 타인과 마주한다.

비록 드라마에는 7개의 인격만 나오게 되겠지만 <킬미힐미>는 그런 상처를 지닌 어른아이에게 은연중에 치료법을 제시하는 힐링드라마의 인격 또한 지니고 있는 듯하다. 나를 가두었던 지하실로 다시 가서 나를 두렵게 한 유년의 어둠과 마주할 것, 물론 나를 지켜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등불 같은 사람과 손을 잡은 채로.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부모의 손에 휘둘리는 인형은 아니니까. 나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설계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니까.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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