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 유준상 덕분에 완성된 독특한 블랙코미디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필자는 현재 박생강이란 필명을 가지고 소설가로 활동 중이다. 하지만 소설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1%의 소설가는 아니라서 박진규란 본명으로 대중문화 관련 칼럼 <박진규의 옆구리TV>를 몇 년째 연재하고 있다. 아쉽지만 소설 이외에 글까지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10%의 글쟁이도 아니기에 최근에 새로운 직업 하나를 더 구했다. 바로 모 신도시에 있는 <빠끔뷰(가명) 휘트니스> 내 락카룸 및 사우나를 정리하는 관리사 일이다. 운동복 쌓아두고, 수건 개키고, 샤워실 겸 사우나에 들어가 한 번씩 정돈하고 이런 잡일들이 주업무다.

SBS 월화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서의 캐릭터로 굳이 따지자면 박집사(김학선)보다는 가정부인 정순(김정영)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 한정호로 출연중인 배우 유준상 아니 유준상 회원님도 자주까지는 아니고 가끔 이곳에 들른다. <빠끔뷰> 내에서는 소설가가 아닌 사우나관리사의 업무에 충실해야 하는 필자는 다른 회원님에게도 그러하듯 유준상 회원님에게도 깍듯하게 인사한다. 회원님들이 혹시 불쾌해하실까 사우나관리사들은 인사나 안부를 묻는 일 외에는 웬만해선 다른 말을 걸지 않는다.

“안녕하세요, 회원님.”

물론 유준상 회원님은 친절하게 인사를 받아주는 편이다.

“네엡, 안녕하세요.”

그리고 유준상 회원님은 묵묵히 운동하고, 샤워하고, 사라진다.

그때 말은 못했지만 사실 그랬다. 유준상 회원님이 <아내의 자격>과 <밀회>의 콤비인 정성주 작가 안판석 PD의 <풍문으로 들었소>에 주연으로 출연한다고 했을 때 조금 의아했다고. 기존에 필자가 지니고 있던 배우 유준상 페르소나는 무언가 짐작할 수 없이 독특한 캐릭터인데 살면서 그래도 한번쯤 드라마 아닌 현실에서 봤을 법한 그런 인물군상이었다. 아마 대학에서의 괴짜선배라든가 사회생활 중에 만난 나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짐작할 수 없이 특이한 직장상사들을 떠올리면 좋을 것 같다.



그런 유준상 회원님의 페르소나를 일반적인 드라마의 룰 안에서 재미있게 녹여낸 경우가 <강남엄마 따라잡기>의 서상원이나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방귀남이었다. 한편 그 독특함을 현실적인 화면 안에서 우스꽝스럽게 드러내준 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었다.

하지만 배우 유준상과 <아내의 자격>, <밀회> 속 인물들 사이에는 어째 연결고리가 이어지지 않았다. 황사가 은근하게 덮인 것 같은 화면 안에서 <아내의 자격>과 <밀회>의 인물들은 자신의 계급에 따라 철저하게 움직인다. 물론 진짜 자기 모습과 계급에서의 모습 사이에 미묘한 균열을 보여주는 것이 <아내의 자격>과 <밀회>의 백미였다. 하지만 유준상 회원님이 보여주는 연기의 매력은 미묘하다보다는 느닷없다, 라는 단어와 잘 어울렸다. 그런데 상류층 인사의 중심에 있는 법무법인 대표 한정호로 유준상 회원님이라니? 혹시나 강남아빠 따라잡기 같은 결과를 초래하진 않을까, 란 생각도 들었다.

짐작대로 <풍문으로 들었소>의 첫회에서 유준상 회원님은 무언가 어색하게 다가왔다. 다른 인물들이 자신의 계급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 같다면 유준상 회원님의 한정호는 무언가 그가 속한 사회 안에서 삐걱거리는 존재 같았다. 마치 자기 스스로의 목소리가 아닌 그의 계급에 가장 적합한 워딩을 구사하는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

“합격은 당연한 거고. 진짜 공부는 인제부터가 시작이야. 할아버지 늘 하시던 말씀 기억하지. 진정한 법률가는 냉철한 휴머니스트이면서 열정적인 합리주의자다.” (한정호)



그런데 첫회를 보고 짐작한 것과 달리 한정호는 냉철한 휴머니스트와 열정적인 합리주의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러길 바라는 어벙하고 다혈질적인 사내였다. 너무 감정이 풍부한 나머지 자기감정을 주체 못해 논리적인 말로 제대로 설명도 못하던 아들 한인상(이준)이 한정호의 본래 성격이었음이 나날이 드러났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씨도둑질은 못한다고.

“가장 현대적이면서, 가장 고전적이고, 그랜드한 매너, 법을 공부하다 보면 그런 게 다 그게 체화가 돼요. 몸에 배는 거지.” (한정호)

말은 그렇게 하나 상류층의 화법과 매너로 자신의 참자아를 겨우 억누르는 한정호는 그래서 어색하다.

그런데 그가 짐작도 못한 사고, 즉 아들이 어느 날 배가 남산처럼 부른 여자친구를 데려오면서 사건은 복잡해진다. 거기다 엉겁결에 한정호는 할아버지가 되고 그의 말마따나 ‘히피 같은’ 고교 자퇴생 며느리까지 집안에 들어온다. 한정호는 자신이 습득한 법률과 논리의 힘을 바탕으로 한 냉철한 언어로 자신의 세계에 침입한 자들을 제압하려 한다.

“여보, 워딩에 신경써요.” (한정호)

하지만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그의 눈에 같잖은 사돈내외는 그의 논리를 뛰어넘는 행동을 보여준다. 그럴 때마다 한정호는 다시 한인상 같은 성격으로 돌아가 냉철한 언어를 잃은 채 흥분해서 어버버버, 거린다. 물론 변호사가 아닌 인간 한정호로 돌아왔을 때도 그는 어버버버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 한정호의 어버버버한 느낌이 유준상 회원님이 보여주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무언가 독특한 어조의 말투와 찰떡궁합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손자를 보고 “할, 할아버지다.”라고 말하는 대사나 아들을 어쩔 수 없이 결혼시킨 후에 비서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주먹으로 눈물 닦으며 우는 남자일 때 그는 인간적인 어버버버다. 하지만 아들 한인상의 아버지가 부끄럽다는 말에 상을 엎고 뛰어내리는 장면에서 그는 이성을 잃어버린 어버버버다. 그리고 <풍문으로 들었소>은 주먹이 우는 남자가 아닌 주먹으로 우는 어버버한 남자 덕에 전작 <밀회>와는 다른 독특한 블랙코미디의 풍미가 느껴진다. 유준상이란 배우는 <풍문으로 들었소>의 제작진에게 이 드라마의 개성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는 카드였던 셈이다.

그런데 <빠끔뷰> 사우나 휴게실에서 거품타월을 접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상함과 어버버버가 공존하는 <풍문>의 한정호는 유준상 회원님의 연기 덕에 상당히 귀엽게 다가오지만 현실의 그들은 과연 귀여울까? 사실 드라마 아닌 현실에서 우리는 남녀불문 고상함의 가면으로 어버버버한 진짜 얼굴을 가린 인물들의 실체를 풍문으로 듣고 있지 않은가? 눈을 빠끔하게 뜨고 4,500원으로 인상된 담배를 빠끔빠끔 피우면서 당신도 한번 생각해 보라. 분명 떠오르는 얼굴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과연 귀여운가 아니면 무서운가?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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