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피’ 닐 블롬캠프 감독의 치명적인 실수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닐 블롬캠프 감독의 신작 <채피>의 주인공 채피는 의식을 가진 로봇이다. 그런데 채피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란 뭘까? 필자도 모른다. 하여간 채피를 만든 프로그래머 디온은 채피에게 의식이 있다는 증거로 예술을 시킨다. 그의 강요를 따른 채피는 파란색 물감으로 버려진 차를 그린다. 디온은, 그러니까 닐 블롬캠프는 이 결과물에 만족한 듯 더 이상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채피가 그린 자동차 그림은 예술일까?

로봇이 그렸기 때문에 예술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채피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수상쩍기 그지 없었다. 그는 보통 사람처럼 윤곽을 그린 뒤 색칠을 하지 않는다. 그의 손은 마치 구식 프린터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이며 기계적으로 형태를 만든다. 그러고 보니 그건 그림이 아니라 정말 사진 프린트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히 사진처럼 정확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저장해놓고 있을 테니, 그 이미지를 최대한 정확하게 출력하기만 하면 됐다. 그 출력기기가 붓을 든 손이었을뿐이다.

정확히 사진은 아니지 않았냐고? 하지만 그 결과물이 특별히 예술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채피가 그린 것보다 훨씬 예술작품처럼 보이지만 사실 영혼없는 기계적인 작업에 불과한 것들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어 내 아이패드에는 수채화 필터 앱이 하나 있는데, 사진을 찍어 불러들이면 꼭 사람이 그린 것과 같은 수채화로 변형시켜준다.

이 역시 예술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사진을 고르고 구도를 계산하고 스타일을 선택한다. 수채화 앱 자체를 예술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앱을 만든 사람들은 인간 수채화가가 가진 기술과 능력 일부를 프로그램에 이식했다고 할 수 있다. 일종의 죽은 예술가 또는 예술가의 유령인 셈이다. 하지만 채피가 그린 그림에는 그 정도의 터치도 안 보였다. 그는 그냥 디온이 가리킨 방향에 있는 물체를 사진으로 찍어 프린트한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은 쉽지 않고 여기서 그런 것을 낼 시도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오늘 말하고 싶은 것은 예술을 가치평가적인 단어로 쓰는 것만큼 게으른 태도는 없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예술이라고 해서 그것이 당장 가치 있거나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아직도 많은 게임 애호가들은 비디오 게임을 예술 장르로 인정받고 싶어한다. 물론 게임을 만드는 데에는 예술적인 창조작업이 들어간다. 하지만 과연 게임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예술작품이 되는 것인가? 체스말과 체스판은 분명 예술작품이고 체스 게임에는 무시못할 아름다움이 있지만 체스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술이 아닌 게임에 있으며 그렇다고 체스가 예술보다 떨어지는 무언가가 되지는 않는다. 예술 타이틀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게임의 독립된 가치를 예술에 종속시킨다.

닐 블롬캠프의 실수도 비슷하다. 그는 기성품화된 가치 그러니까, 예술, 감정, 인간성과 같은 것들을 아무런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이것들을 하나씩 던지며 인공지능으로서 채피의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그 때문에 아무리 특수효과가 뛰어나도 채피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예술가, 인간 어린이, 인간 청소년의 얄팍한 흉내로 남는다. 새로운 지성체로서의 개성이나 매력, 의미 따위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1980년대라면 이 정도의 트릭도 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빅 히어로>, <엑스 마키나>와 같은 성실한 SF가 연달아 나온 지금 와서 보면 <채피>의 시도는 안이하고 시대착오적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채피>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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