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감독의 의도와는 다른 한국관객의 오독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한국에서 유달리 히트하는 외국 영화들이 있는데, 그 흥행결과는 영화 자체보다는 우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예를 들어 <레 미제라블>의 흥행은 영화 개봉 당시 이 나라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될 것이다. 심지어 영국보다 더 잘 팔렸던 <킹스맨>은 우리가 판타지 영국 이미지를 어떻게 기형적으로 소비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인터스텔라>는 아무리 어려운 과학지식을 동원한 하드 SF라도 적당히 가족, 그것도 아버지 이야기를 집어넣으면 한국 관객들은 알아서 극장으로 찾아온다는 예이다. <비긴 어게인>은... 그것도 이유가 있겠지만 거기까진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다.

최근에 이 리스트에 <위플래쉬>가 추가됐다. 위대한 드러머가 되려는 음악학교 학생과 잔혹하기 짝이 없는 선생의 2인극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무시무시한 영화는 개봉 당시에도 수많은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처럼 대중의 사랑을 받은 나라는 거의 없다. 또 하나의 한국적 현상인 것이다.

다른 영화에서와는 달리 이 현상은 많이 위험해 보인다. <레 미제라블>이나 <인터스텔라>의 소비는 한국적이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오독하지는 않는다. 단지 취사선택할 뿐이다. 하지만 <위플래쉬>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리고 이 영화에 가해지는 오독은 지독하게 한국적인 현상일 수 있다.

<위플래쉬>의 상영관을 찾은 관객들은 모두 같은 영화를 보는 게 아니다. 최소한 그들은 세 개의 영화를 동시에 본다. (1) 폭력적이고 위험한 선생과 그에 못지 않게 위험한 정신상태의 학생이 벌이는 대결을 다룬 드라마틱한 영화, (2) 온갖 방법을 동원해 제자의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스승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 (3) 척 봐도 사이코인 놈을 스승이라고 치켜올리는 나쁜 영화. (1)은 감독의 의도이다. (2), (3)은 우리가 이 상황을 한국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필자 주변 사람들은 모두 (1)의 영화를 본다. 하지만 그건 내가 인간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고를 수 있는 운좋은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놀랄 정도로 많은 수의 (2)번 관객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감독의 의도가 (1)이라고 말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이유는 둘로 나뉜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우린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의 틀에 갇혀 있다. 이들이 다른 의미로 존재한다는 가능성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린 <위플래쉬>의 선생 따위는 얌전해 보일 정도로 폭력적인 교육환경의 희생자이다. 이미 스톡홀름 증후군의 희생자가 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 정도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첫 번째를 당연시하고 두 번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는데, 이들은 (2) 대신 (3)의 영화를 본다.

비관적인가? 끔찍하긴 하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교육법으로 이전 학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남자를 진정한 스승으로 여기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예술계는 온갖 종류의 미친 짓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곳이지만 이건 그냥 아닌 거다. 만약 <위플래쉬>의 흥행이 (2)번 영화를 본 사람들 덕택이라면 우린 아주 위험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이들 관객들은 정확한 정보가 주어지면 교정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적절한 조건 하에서 유익한 토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지만 <위플래쉬>는 그런 일그러진 우리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거울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아마 오독을 동반하지 않은 정상적인 나라에서보다 이 나라에서 더 생산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위플래쉬>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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