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지’, 김인영 작가의 아주 영리한 선택

[엔터미디어=소설가 박진규의 옆구리tv] KBS 수목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이란 제목을 들었을 때 은근히 이 작품 기대가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의 역사와 맞서는 제목이었으니까. 대개의 드라마는 언제나 착한 여자들과 나쁜 여자들의 싸움이었다. 그 사이에는 어린 시절의 원한이 있거나 혹은 허우대 멀쩡하나 책임감은 없는 남자가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하게 착한 여자도 또 완벽하게 나쁜 여자도 그렇게 흔치 않다. 다만 극적인 재미를 위해 드라마는 그렇게 잔가지를 쳐내고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의 싸움으로 몰아갈 따름이다.

하지만 그 잔가지 혹은 잔뿌리에는 시시콜콜하면서 말 못한 애틋한 사연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그 지점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은 제목이었다. 더구나 KBS 수목드라마 <태양의 여자>를 통해 김인영 작가는 이미 악녀지만 미워할 수 없는 여주인공인 아나운서 서도영(김지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뚜껑 열린 <착하지 않은 여자들>은 기대에 부응하는 아니 현재까지 기대 이상의 재미를 주는 독특한 드라마다. 주연배우 송승헌의 근육에 눌린 것처럼 어딘지 의기소침했던 전작 <남자가 사랑할 때>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그 동안에 자신이 다년간 드라마를 써오며 보여준 재능을 신나게 펼쳐낸다.

김인영 작가는 <착하지 않은 여자들>을 통해 단순히 성녀와 악녀 사이의 여자들의 이야기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성녀와 악녀를 다뤘던 드라마의 룰을 차용하면서도 조금씩 비틀면서 익숙하지만 꽤 색다른 맛을 풍기는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면 여주인공 김현숙(채시라)의 복수가 이 드라마의 큰 축이지만 복수의 원인이 남자는 아니다. 억울한 이유로 퇴학당한 현숙은 자신을 퇴학시킨 담임 여교사와 맞선다. 딸을 박사로 만들어도 회복되지 않는 인생의 상처 때문이다. 더군다나 공부는 못했지만 날라리까지는 아니고 그저 똘끼(?)가 좀 있는 소녀였던 현숙은 모든 걸 모범생과 열등생 이분법으로 나누는 담임여교사의 눈엔 나쁜 여학생으로 보였다. 그 바람에 그녀는 도둑으로 몰려 퇴학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 까닭에 담임교사와 현숙의 싸움은 말 그대로 나쁜 여자로 분류된 착하지 않은 여자가 자기의 인생을 발견해가는 줄거리로 읽히기도 한다.



한편 본부인 강순옥(김혜자)과 불륜녀 아닌 불륜녀로 오해 받고 평생을 살아온 장모란(장미희)의 관계도 그러하다. 강순옥은 남편에게 여자로서 사랑받지 못하고 동치미 냉면 잘 만드는 아내로서만 인정받은 여자다. 과거 남편의 사랑은 고상하고 어딘지 비련의 여주인공 분위기가 감도는 장모란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장모란은 강순옥의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약혼남과 파혼당했을 때 약간 의지했을 따름이었다. 물론 이 의지라는 빌미 때문에 한 남자는 가정을 버릴 결심을 했고 그 남자의 아내는 평생의 한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랜만에 해후한 강순옥과 장모란,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긴장감 있으면서도 어떤 때는 사랑스러울 정도다. 오히려 이 드라마의 다른 부분보다 식상한 패턴이라 살짝 김이 빠지는 현숙의 딸 정마리(이하나)의 로맨스보다 나이 든 두 여인들의 묘한 자매애가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현숙과 현숙의 전남편인 정구민(박혁권)과의 관계도 은근히 드라마의 규칙을 위반한다. 대학시절 현숙의 과외선생이었다 제자와 눈 맞은 이 남자는 비록 헤어졌지만 지금도 괜찮은 남자다. 드라마에서 아내의 전남편이 나쁜 놈이 아니고 이렇게 괜찮기는 또 오랜만이다. 무엇보다 이혼한 아내에게 과외선생을 자처하며 “공부해서 수능보자”고 꼬드기는 전남편은 최초가 아닐까 싶다.



한편 드라마 규칙 비틀기 외에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작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건 바로 기존의 여배우들이 지닌 페르소나를 고스란히 가져오면서 거기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점이다.

특히 이 드라마의 큰 축을 맞고 있는 배우 김혜자와 장미희의 캐릭터에서 그런 지점은 더욱 돋보인다. 다이아반지와 큐빅반지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이 두 여배우는 기존의 캐릭터를 가져오면서도 동시에 그 동안 자신이 보여줄 수 없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진다.

그런 에피소드가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는 꽤 많기 때문에 이 드라마의 여배우들은 무언가 자신의 연기를 스스로 즐기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착한 여자 혹은 나쁜 여자만 드라마에서 연기하느라 답답했던 캐릭터들에게 착하지 않은 순간은 오히려 흥미로운 일탈일 것이기 때문이다.

<착하지>는 대규모 제작비의 장르물도, 한류스타가 출연하는 로코물도, 온갖 자극이 난무하는 막장드라마도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홈드라마의 성격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건전하고 시원하고 담백하다. 하지만 순간순간 드라마의 규칙들을 위반하고 또 익숙한 캐릭터들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면서 흥미진진함을 잃지 않는 영리한 작품이기도하다.

칼럼니스트 박진규 pillgoo9@gmail.com

[사진=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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